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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21. 2024

폴 오스터 존 쿳시 《디어 존, 디어 폴》

좋은 소설을 쓰는 좋은 소설가들은 일상에서 어떻게 사유하는가...

  책은 폴 오스터와 존 쿳시가 2008년에서 2011년까지 주고 받은 편지를 모은 서간집이다. 이들은 우정, 남자들의 우정, 근친상간, 스포츠, 금융 위기, 허구, 사뮈엘 베게트, 스포츠, 모국어, 영어, 에드워드 사이드, 독자, 예술, 게임, 기억, 카프카, 서평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아파르트헤이트, 넬슨 만델라, 문화 저널리즘, 종이책, 노년, 독자의 편지, 소설과 실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권력, 휴대 전화, 자유, 전화번호부, 불면증, 나이 듦 등에 관하여 진솔하게 서로의 의견을 나눈다.


  “우정에 대해 뭔가 재미있는 얘기를 하기란 정말이지 무척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또 하나의 통찰을 얻을 수 있지요. 즉, 겉보기와 전혀 딴판인 사랑이나 정치와 달리 우정은 보이는 그대로다. 우정은 투명하다.” (pp.13~14) - 존 쿳시


  존 쿳시가 1940년생이고 폴 오스터가 1947년생이다. 존 쿳시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이고 폴 오스터는 미국 출신이다. 두 사람은 특히나 소설가로 잘 알려져 있고, 존 쿳시는 2003년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폴 오스터의 소설에 비하여 존 쿳시의 소설이 좀더 묵직하다. 존 쿳시의 소설에 비하여 폴 오스터의 소설은 좀더 대중적이다. 두 사람의 소설 중 일부는 영화화 되기도 하였다.


  “우리가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현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허구의 힘이고, 우리 세계에서 최고의 허구는 돈입니다. 돈은 무가치한 종잇조각이 아니고 뭡니까? 그 종이가 가치를 얻었다면 그것은 단지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가치를 부여하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시스템은 믿음 위에서 작동합니다. 진실이나 현실이 아니라 집단적인 믿음 말입니다.” (pp.36~37) - 폴 오스터


  두 사람은 편지를 나눠야 할 만큼 어떤 공통의 영역을 가지고 있지 않고 (물론 반대로 편지를 나눠야 할 만큼 대척에 있는 영역을 가지고 있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서로를 향하여 자신이 지금 현재 궁금하게 여기는 어떤 사안에 대하여 상대방의 의견을 묻고, 또 상대방이 건넨 의견에 자신의 의견을 보태기도 한다. 아마도 상대에 대한 믿음이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 같고, 특히 존 쿳시를 향한 폴 오스터의 믿음은 상대적으로 더욱 굳건해 보인다. 


  “이틀 전인가, 우리의 편지 교환이 저에게 미친 효과에 대해 놀랄 만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지난 3년 가까이 편지를 주고받아 왔는데, 그동안 당신은 <부재하는 타인>, 즉 어린아이들이 스스로 고안한 상상의 친구와 같은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리저리 거닐며 종종 머릿속으로 당신에게 말을 걸때가 있습니다. 당신이 제 곁에 있어, 길거리에서 지금 막 제 옆을 지나친 이상하게 생긴 사람을 가리키면서 우연히 듣게 된 기묘한 대화 한 토막을 전하거나, 제가 자주 점심을 해결하는 작은 샌드위치 가게로 데려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처음 겪어 봅니다. 어쩌면 이렇게 정기적으로 누군가와 편지를 주고받아 본 적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효과는, 단언컨대 정말로 유쾌한 것입니다.” (pp.310~309) - 폴 오스터


  서로를 인정하는 면에서 다르지 않지만 왠지 폴 오스터는 존 쿳시를 선배로 따르는 듯 하고, 존 쿳시는 폴 오스터를 후배로 귀여워 하는 것 같다, 고 마음대로 생각해본다. 폴 오스터가 자신의  소설 『보이지 않는』을 보냈을 때 그것을 읽고서는 편지에 ‘두 부분으로 나누어 읽었습니다. 말하자면 두 입에 꿀꺽, 이죠.’ 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존 쿳시 또한 폴 오스터에게 큰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 프랑스인들이 미국 작가가 쓴 책을 출간할 때면 속표지에 이렇게 쓰는 것이 사실입니다. Traduit de l'americain(미국어에서 번역)이라고요, Traduit de l'anglais(영어에서 번역)rk 아니고. 저는 미국에 대한 불평거리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만, 미국적인 모습으로 구현된 영어에 대해서만큼은 불평하지 않습니다.” (p.99) - 존 쿳시


  이들은 또한 자신들이 언어를 다루고 문학이라는 예술 활동을 하고 있다는 공통의 사실에서 비롯된 여러 의견을 나누기를 즐긴다. English를 사용하기는 하지만 한 명은 미국의 영어로, 또 다른 한명은 남아프리카의 영어(에서 비롯되었고 지금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영어로)를 사용한다는 사실에 대해 주고받는 의견이 흥미롭다. 충분한 양의 독자들을 거느리고 있으며, 그들에게서 편지를 받기도 하는 두 사람이 독자를 대하는 방식도 재미있다.


  “... 스스로 사물을 보는 기술, 자기 머리로 이미지를 떠올리는 기술이 바로 독서 아닙니까? 그리고 독서의 아름다움은 이야기 속으로, 다른 모든 소리들을 배제하고 내 안에서 울려 퍼지는 저자의 음성 속으로 뛰어들 때 우리를 둘러싸는 <침묵>이 아닙니까?” (p.240) - 존 쿳시


  여러 가지 이유로 두 사람에게 편지를 쓰는 독자들이 있을 것인데, 존 쿳시는 그들에게 좀더 깊숙한 시선을 보내는 듯하고 폴 오스터는 그의 소설처럼 조금은 냉소적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두 사람은 편지를 나누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면모를 보이기도 하지만 이를 상대방의 입장에서 타협하는 것은 아니다. (실은 폴 오스터는 살짝 그런 면도 있다) 각자의 생각을 그저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자신의 생각을 주석처럼 단다.


  “... 그녀가 책의 여주인공이 될 기회를 얻고 싶다면 자기 삶의 어느 전형적인 하루를 길고 세밀하게 묘사한 글을 보내는 편이 더 나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녀가 저에 대해, 혹은 삶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소설가들과 그들의 영감의 근원에 관하여 밝혀둘 점이 있습니다. 즉 그들은 종종(거의 항상?) 자기 모델의 독특하고 개별적인 본질을 헤아리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고, 단지 머리카락이 어떻게 귀 뒤로 굽이치며 흘러내리는지, 어떻게 <근사해!>라고 외치는지, 걸을 때 발가락이 어떻게 휘어지는지 등 흥미롭고 써먹을 만한 특징이나 기벽만 가져다 씁니다... 저로 말하자면, 무(無)에서 인물들을 만들어 내는 걸 더 좋아합니다. 그리하여 더 진짜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p.255) - 폴 오스터


  “최근에 A. R. 애먼스 사후에 발표된 시를 우연히 보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이 먹으면서 늙어 간다, 나이 먹는 것에 대한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찾으려는 시도조차 늙어 간다. 에먼스가 그 시를 썼을 때와 거의 비슷한 나이가 되었지만 저는 전혀 그런 기분이 들지 않습니다. 사물은 계속 제 앞에 새롭게 드러나거나, 적어도 초점이 더 또렷해집니다. 젊을 때보다 선명하게 보입니다. 저의 착각일까요?” (p.329) - 존 쿳시


  편지를 쓰는 동안 한 사람은 (존 쿳시는) 칠십을 넘겼고 다른 이 (폴 오스터) 또한 칠십에 가까운 나이가 되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아직 사회에 대한, 그리고 자신들이 하는 작업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고 있다. 사회를 향한 그들이 관심이 바로 그들이 하는 작업의 초석이라는 사실에 대한 반증일 수도 있겠다. 멈추지 않고 좋은 소설을 써내는 소설가들이 어떻게, 일상에서도 사유하는가, 를 볼 수 있어 좋았다. 



폴 오스터 Paul Auster 존 쿳시 J.M.Coetzee / 송은주 역 / 디어 존, 디어 폴 (Here and Now: Leetters 2008~2011) / 열린책들 / 2016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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