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에서 위대성을 덜어내고자 사용하는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에 대해...
책에는 네 편의 한나 아렌트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1964년 독일 ZDF 텔레비전의 프로그램에서 저널리스트 귄터 가우스와 나눈 <무엇이 남아 있느냐고요? 언어가 남아 있어요>, 1964년 독일 SWR 텔레비전의 프로그램에서 요아힘 페스트와 나눈 인터뷰인 <아이히만은 터무니없이 멍청했어요>, 1970년 독일 작가 아델베르트 라이프와 나눈 인터뷰인 <정치와 혁명에 관한 사유 - 하나의 견해>, 그리고 1973년 프랑스의 프로그램 주목할 만한 시선에서 로제 에레라와 나눈 인터뷰가 <마지막 인터뷰> (한나 아렌트는 1975년 사망하였다) 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 우리는 어떤 범죄자를 떠올릴 때 범행 동기가 있는 사람을 상상해요. 그런데 아이히만을 살펴보면 실제로는 아무 범행 동기가 없었어요. 우리가 일상적으로 범행 동기라고 이해할 만한 게 없었다는 거죠. 그는 나머지 사람들에게 동조하기를 원했어요. 그는 ‘우리’라고 말하고 싶어했는데, ‘나머지 사람들에게 동조하기’와 ‘우리라고 말하고 싶어 하기’만으로도 역사상 가장 극악한 범죄가 자행되게 만들기에 충분했죠... 내가 우선 말하고 싶은 것은, 남들에게 동조하는 것-많은 사람이 함께 행동하는 데 끼고 싶어하는 것-이 권력을 낳는다는 거예요. 혼자 있을 때는 당신이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늘 무력해요. 함께 행동하는 데서 유발되는 이런 권력의 느낌은 그 자체로는 절대로 그릇된 게 아니에요. 그건 인간이 느끼는 일반적인 감정이에요. 그렇다고 선한 감정도 아니에요. 그냥 중립적인 감정이에요. 그건 단순히 하나의 현상이라고 기술할 필요가 있는 보편적인 인간적 현상이에요.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극도의 쾌감이 느껴지죠... 당신이 거기서 얻는 것은 그저 관성대로 굴러가는 것일 뿐이죠. 이런 단순한 기능에서 얻는 쾌감이, 이런 쾌감이 아이히만에게서 꽤나 눈에 잘 띄었어요...” (pp.76~77)
스스로를 정치이론가라고 부르고 있는 한나 아렌트에게 대중적인 인지도를 부여한 것은 그가 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 때문이다. 그 책이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것은 이 책의 부제에 드러난 ‘악의 평범성’ 이라는 개념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은 한나 아렌트가 (한나 아렌트 자신도 유대인이면서) 너무 보편적으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2000년까지 한나 아렌트의 저작은 이스라엘에서 발간되지 못했다고 한다)
『... 내가 말하려던 바는 그게 아니었어요. 나는 우리 모두의 내면에 아이히만이 있고, 우리 각자는 아이히만과 같은 측면을 갖고 있다는 말을 하려던 게 절대 아니에요. 내가 하려던 말은 오히려 그 반대예요! 나는 내가 누군가를 꾸짖으면 그들이 내가 들어본 적도 없는, 그래서 전혀 흔하지 않은 말을 하는 모습을 완벽하게 상상할 수 있어요. 그러면 나는 “너무 평범해banal.(‘진부해’라는 뜻도 있다)” 하고 말해요. 아니면 “별로 안 좋아”라고 말하거나요. 그게 내가 말하려던 뜻이에요.“』 (p.82)
책의 앞쪽에 실린 두 편의 인터뷰는 모두 1964년에 이루어졌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1963년에 발간되었다) 아마도 그 때문인지 대화의 많은 부분이 그 책에 대한, 그리고 한나 아렌트가 보고 있는 아이히만에 대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자신의 책에 가해지는 많은 비판을 의식하고 있는 듯, 한나 아렌트는 자신이 책을 통해 밝히려고 했던 바, ‘악의 평범성’ 에 대해 여러 번에 걸쳐 말한다.
“... 아이히만은 완벽하게 지적이었지만 이 측면에서는 멍청했어요. 너무도 터무니없이 멍청한 사람이었어요. 내가 평범성이라고는 말로 뜻하려던 게 바로 그거예요. 그 사람들 행동에 심오한 의미는 하나도 없어요. 악마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고요! 남들이 무슨 일을 겪는지 상상하길 꺼리는 단순한 심리만 있을 뿐이에요...” (p.85)
한나 아렌트는 자신은 ‘악의 평범성’에 대해 그것이 우리 주변이든 아니면 우리 내면이든 어디서든 흔하게 발견된다는 의미에서 사용하지 않았다고 누누이 밝히고 있다. 한나 아렌트는 나치의 범죄가 악마의 것으로, 그러니까 어떤 부정적인 의미에서 위대한 행위로 받아들여질 수 있음을 경계하기 위해 ‘악의 평범성’ 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것이라고 말한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얼마나 평범하고 따분한 멍청이일 따름인지를 밝히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집필한 의도 중 하나는 악惡이 위대하다는 통설을, 악마 같은 세력이 위대하다는 통설을 깨뜨리고, 사람들이 리처드 3세 같은 엄청난 악인들에게 품고 있는 존경심을 사람들에게서 걷어내는 것이었어요. 브레히트에게서 이런 문장을 찾아냈어요... 거물정치범들은 사람들 앞에, 특히 폭소 앞에 노출시켜야 한다. 그들은 거물 정치범들이 아니라 거대한 정치적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로, 이 둘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히틀러가 벌인 일들이 실패했다는 게 그가 멍청이였음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히틀러가 실패했다는 게 그가 멍청이였다는 것을 보여주지도 않았고, 그가 벌인 일의 규모가 그를 위대한 인물로 만들어주지도 않았다... 설령 그가 1000만 명을 죽였더라고 그는 여전히 어릿광대다.” (pp.191~192)
한나 아렌트는 특히 아이히만이 진정으로 사유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특히나 아이히만은 (어쩌면 나치의 전쟁 범죄를 최상부에서 기획하고 수행한 사람들은)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사유하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 같았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그는 자신이 저지른 유대인에 대한 행위에는 괴로워하지 않았는데, 단 하나 유대인 공동체의 회장의 뺨을 때린 일만큼은 그릇된 것으로 여겼다. 그것이 뭔가 모양새 빠지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사유한다는 말은 항상 비판적으로 생각한다는 뜻이고,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것은 늘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거예요. 실제로 모든 사유는 엄격한 법칙, 일반적인 확신 등으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건 기반을 약화시켜요. 사유하다가 일어나는 모든 일은, 거기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건 비판적으로 검토할 대상이 돼요. 즉, 사유 자체가 그토록 위험한 일이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위험천만한 사유란 존재하지 않아요. 이걸 어떻게 확신하느냐면......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편이 훨씬 더 위험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사유가 위험하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나는 사유하지 않는 것이, ne pas relfchir c'est dangereux encore (사유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위험하다)고 말할래요.” (pp.179~180)
사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는 중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한나 아렌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우리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 우리에게도 깃들 수 있는 ‘악의 평범성’을 경계할 수 있다면, 우리가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우리의 악한 측면을 합리화하는 기제로 사용하지 않을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런 면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바로 그 ‘사유’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 / 윤철희 역 / 한나 아렌트의 말 : 정치적인 것에 대한 마지막 인터뷰 (The Last Interview and Other Conversations) / 마음산책 / 207쪽 / 2016 (1965, 2011, 1972, 1999,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