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객을 물 먹이고, 겉과 속이 다르거나 말거나, 유럽으로...
*2016년 2월 23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지지난 주던가, 일본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는 아내를 픽업하는 참에 아내의 동료를 함께 태운 적이 있다. 그 친구는 매년 두어 차례 이상 해외여행을 다녀야 직성이 풀리는 헤비 트래블러였다. 최근에 다녀온 곳을 물었더니 오스트레일리아에 다녀왔다고 했다.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여주고는 말했다. “거기 좋지, 해안은 정말 최고야, 하지만 그러면 뭐하나 이런저런 위험 생물 때문에 그 좋은 바닷물에 발도 못 담글텐데... (그것 말고도 오스트레일리아는 어쩌고 저쩌고 여차저차 중얼중얼...)” 그러자 그 친구가 반색을 하며 말했다. “와, 맞아요, 어떻게 아세요? 오스트레일리아에 다녀오셨어요?”
“... 코펜하겐은 또한 내가 가본 곳 중에서 사무실 여직원들이 점심시간에 나와 시립 공원에서 상의를 벗고 일광욕을 하는 유일한 도시다. 누가 뭐라 해도 이 점만으로도 나는 매년 코펜하겐을 유럽의 문화 도시로 선택한다.” (p.169)
내가 잠자코 있자,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아내가 한 마디 툭 던졌다. “다 거짓말이야. 오스트레일리아를 가기는 뭘 가... 저 사람 말 신경 쓰지 말어. 몇 년 전부터 준비하던 여행도 막상 닥치게 되면 그만 두고 마는 사람이야...” 나는 그 후로도 그녀가 다녀왔다는 이런 저런 대륙과 나라들에 대해 묻고 이렇게 저렇게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우리의 대화는 결국 이렇게 마무리를 지었다. “뭐라고? 요르단을 안 갔다 왔다고? 그러니까 중동 지방을 가본적이 없다는 말이네, 아쉽군. 요르단을 여행해보지 않았다면 세계 여행을 다녔다고 말할 수는 없지. 그런 면에서 나와 OO씨는 같은 처지랄까...” 그렇게 아내의 동료를 내려 주고 오는 길에 나는 아내에게 혼찌검이 났다. 입만 살아가지고...
“... 이탈리아 인들은 질서란 질서는 모두, 전혀 지키지 않는다. 이들은 모종의 아수라장 속에 살지만, 내게는 이것이 매력적으로 보인다. 이들은 줄도 서지 않으며 세금도 안 내고 약속 시간도 지키지 않는다. 적은 뇌물이라도 받지 않고는 어떤 노동도 하지 않으려 들며 규칙이란 걸 아예 모르고 산다...” (p.215)
내가 입이라도 살아 있도록 만들어주는 데 큰 기여를 하는 인물 중 하나가 아마도 빌 브라이슨일 것이다. 그의 여행기는 너무나 실감이 나서, 어마어마한 트레일 코스인 미국의 애필래치아 산맥을 직접 걷고 나서 쓴 《나를 부르는 숲》을 읽고, 나는 허벅지가 단단해져 며칠 동안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을 힘겨워할 수밖에 없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이다. 아, 덧붙이자면 그의 여행기는 과장과 허세의 블랙 유머로 가득 차 있기도 하다.
“... 이들은 점잔을 빼고 무자비할 정도로 이기적인 성향이 있다. 외국인 노동자들을 수십만 명이나 데려오면서도 시민권 주는 것을 거부했다. (스위스에서 다섯 명 중 한 사람은 외국인이다.) 경기가 어려워지면 외국인 노동자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스위스 인들은 이렇게 해서 불경기일 때 실업 수당이나 의료 보험 등 사회보장을 제공할 필요도 없이, 호경기에는 값싼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다. 또 이런 방법으로 인플레를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고 안락하고 쾌적하게 자국민의 생활수준을 유지하는 것이다. 물론 이해는 할 수 있지만 존경심은 들지 않는다.” (p.295)
이번 책은 이러한 빌 브라이슨이 90년대에 쓴 유럽 여행기이다. 제목은 ‘발칙한’ 유럽산책이고 부제에는 ‘훈훈한’ 여행기라고 되어 있는데, 사실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훈훈함과는 꽤 거리가 멀다. 그의 발아래 놓인 유럽의 이곳저곳은, 노르웨이와 프랑스와 벨기에와 네델란드와 독일과 스웨덴과 이탈리아와 스위스와 리히텐슈타인과 오스트리아와 유고슬라비아와 불가리아와 터키는 여행객을 물 먹일 준비를 하고 있는, 겉만 번지르르한 곳일 뿐이다.
“나는 무심하게 이토록 아름다운 곳은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게 바로 오스트리아의 문제야... 여행하는 내내 몇 번 입을 연 적이 없는 과묵한 토마스가 갑자기 열정적으로 말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나라인데, 망할 오스트리아 놈들로 가득하거든.” (p.321)
그러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유럽의 겉과 속이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는 Neither Here Nor There (책의 원제이다.) 사람이라면 유럽에 가보든지 말든지, 하는 것이 이 책이 던지는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그래도 책은 재미있다. 빌 브라이슨은 입만 살아 있는 것이나 손과 발과 머리가 동시에 살아 있는 글을 쓰고 있다. 아내 말에 의하면 입만 살아 있는, 나 같은 이가 읽기에 적당하다.
빌 브라이슨 Bill Bryson / 권상미 역 / 발칙한 유럽 산책 (Neither Here Nor There) / 21세기북스 / 390쪽 / 2008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