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가 던지는 짧은 문장을 잽처럼 맞다, 어느 순간 그로기 상태가 되어버
“... 나는 그것이 더 쉽기에, 내가 알고 좋아하지만 특별한 연결이 없는, 그들을 부를 단어를 생각할 수가 없는, 친구가 아닌 사람들을 ‘친구들’이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다. 기차에서 역방향으로 앉아 있으면 나는 사물들이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떠나가는 것만 본다. 나는 은퇴 후를 준비하고 있지 않다. 나는 양말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구멍이라고 생각한다...” (p.10)
나는 애초에 ‘기차에서 역방향으로 앉아 있으면 나는 사물들이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떠나가는 것만 본다.’ 라는 문장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의 바람과는 무관하게도 그 앞뒤의 문장을 읽지 않을 수 없었고, 책을 모두 읽고 이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을 옮겨 적는 과정에서 앞뒤의 문장을 제외시킬 수 없었다. 어쩌면 《자화상》을 적고 있는 에두아르 르베도 그랬을지 모른다.
“... 나는 클래식 음악에서 새로운 경이로움을 발견하기리라 기대하지 않지만 죽을 때까지 이미 알고 있는 것들에서 기쁨을 누리게 될 거라고 확신한다. 누군가 바흐의 음악에서 더 나아갈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감히 언급할 수는 없는 다른 사람들의 음악에서는 확실히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내가 잘못한 것을 인정한다...” (p.28)
나,를 적어 내고자 작정을 하는 순간, 내 삶의 사소한 것과 사소하지 않은 것을 구분하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집중하거나 선택하는 작업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에두아르 르베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지 않기로 작정을 한 것인지 아니면 그는 원래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인지 알 수 없다. 짐작컨대 아마도 그는 후자였을 것이다. 그렇게 그는, 어쩌면 우리가 알고 싶어 하지 않을 수 있는 것까지를 포함시킨, 자신의 ‘자화상’을 적어낸다.
“... 나는 설명하지 않는다. 나는 변명하지 않는다. 나는 분류하지 않는다...” (p.42)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자화상’에 포함되는 사람이나 사물까지도 그저 드라이하게 적어낸다. 그림이 아니라 사진으로 찍어내듯 적고 있다. 사실 1965년생인 저자는 주로 사진 작가의 길을 걸었다. (그림을 그렸으나 한 번의 전시회 이후 그림을 불태웠고, 이후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2002년 사진을 찍기 위해 (그는 유럽의 도시명을 가진 미국의 도시들을 방문하여 사진 찍는 작업을 하였다) 미국을 방문하였을 때 이 ‘자화상’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자화상’을 적어가는 동안 나이를 먹은 것 같다. (책 안에서 글을 적고 있는 자신의 나이를 서른 아홉이라고 밝히는 순간이 있다.)
“... 나는 시력을 잃지 않을 것이고, 청력을 잃지 않을 것이며, 팬티에 오줌을 싸지 않을 것이고, 내가 누군지 잊지 않을 것이며, 그 전에 죽을 것이다...” (p.50)
그는 2007년 《자살》이라는 소설의 원고를 출판사에 넘긴 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소설 《자살》의 내용은 에두아르 르베가 겪은 친구의 죽음을 내용으로 한다. 《자화상》에 짧게 실려 있는 글을 보자면, 그의 친구는 테니스를 치기 전 집에 뭔가를 두고 나왔다고 아내에게 말한 후,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지하실에서 머리에 총을 쏘았다.) 어쩌면 그의 《자화상》은 그의 지나온 삶을 담고 있으면서 예언서의 역할도 겸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 나는 내 사물들이 슬플 때면 그들에게 이야기를 한다. 나는 내가 글을 쓰는 이유를 모른다... 나는 삶 후의 삶은 있지만 죽음 후의 죽음은 없다고 믿는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지 묻지 않는다... 내 인생 최고의 날은 이미 지나갔을 수도 있다.” (p.144)
책의 장르를 무어라고 규정짓기는 어렵다. 그야말로 ‘자화상’이라고 밖에 (자서전이라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가장 가깝게는 일기글을 떠올려볼 수 있지만 날짜가 빠져 있다. 가장 독특한 것은 문장이다. 《자화상》의 문장은 툭툭 뻗는 권투 선수의 잽을 닮았다. 어느 정도까지는 건들건들 거리며 저자의 문장에 몸을 맡겨도 상관없다. 하지만 그렇게 쌓인 데미지 탓에 무릎이 꺾이는 순간이 오고는 한다. 몇 차례 그런 순간을 겪었고, 다 읽고 나서 그만 그로기 상태가 되었다.
에두아르 르베 Edouard Levé / 정영문 역 / 자화상 (Autoportrait) / 은행나무 / 147쪽 / 2015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