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오베 크나우스고르 《나의 투쟁 1》

한 인간의 시간을 축조하는 지극히 사적인 기술 방식이 하나의 스타일로..

by 우주에부는바람

“오늘은 2008년 2월 27일. 밤 11시 43분.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는 1968년 12월에 태어났다.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서른아홉 살인 셈이다. 내겐 아이가 셋 있다. 바니아, 헤이디, 그리고 욘. 나는 결혼을 두 번 했고, 지금의 아내 이름은 린다 보스트룀 크나우스고르이다. 가족들은 지금 내 서재를 둘러싸고 있는 각자의 방에서 세상 모르고 잠에 빠져 있다. 우리는 1년 반이라는 세월을 말뫼라는 스웨덴의 한 도시에서 살았다. 이 도시에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p.41)


‘크나우스고르 현상’ 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하나의 ‘현상’이 되어버린, 인구가 5백만 명 정도인 노르웨이에서 50만 부가 팔렸다는,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의 소설인 《나의 투쟁》 은 흥미롭다. 600페이지가 넘는 소설은 (게다가 《나의 투쟁》은 모두 여섯 권이며, 이것은 그 중 첫 권에 불과하다.) 주목을 받을만한 특이한 서사가 없는, (디테일까지 자전적인) 지극히 사적인 일상의 기록들로 채워져 있다.


“서재를 나와 계단을 내려갈 때, 그는 죽음에 대한 의미심장한 말을 한 마디 툭 던졌다. 무뚝뚝하고 짤막한 한마디였지만 아이러니가 섞인 농담처럼 들리기도 했다. 나는 그 말은 꼭 기억해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주 중요하고 의미 있는 말이니 죽을 때까지 기억하리라 결심했지만, 시인의 집을 나와서 차를 타고 하당어 피오르에 도착하기도 전에 나는 그 말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p.510)


그것이 얼마나 사적인 것인지는 위와 같은 문장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는 자신의 한 시절을 복기하면서 소설을 적고, 그 시절의 복기 중에 그예 놓치고 만 기억들까지를 그대로 실토한다. 게다가 직설적이고 곧이곧대로 이기도 해서 그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떠오른 유산으로서의 돈을 떠올리며 ‘생각은 생각일 뿐. 떠오르는 생각들을 어쩌란 말인가.’ 라고 말하며 스스로를 후레자식으로 만드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그는 이 소설로 인해 자신의 아버지의 동생과 전처에게 소송을 당하기도 하였다.)


“나는 수년 동안 내 아버지에 대해 글을 써보려 했지만, 마음대로 잘 되지 않았다. 아마 내 삶에 너무나 가까운 소재였기에 문학이라는 틀 안에 가두어 표현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글을 쓰는 데 필요한 한 가지 법칙은 이야기를 다듬어 문학이라는 형식과 틀 안에 가두어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체, 구성, 플롯, 주제 등 문학을 이루는 세부 요소가 문학이라는 틀보다 더 클 경우, 그 결과는 보잘것없다. 흔히 문체나 주제에 강한 작가들을 보면, 그들이 만들어내는 문학은 허약하고 미미하다... 이렇듯 문학이 일어나고 태어나기 위해서는 그 속에 자리하고 있는 강렬한 세부적 요소들을 분해하고 해체해야 한다. 분해하고 해체하는 작업이 바로 ‘글쓰기’다. 글을 쓴다는 것은 창조라기보다는 오히려 파괴에 가까운 작업니다...” (p.302)  


얼마 전 족쇄가 풀려버린 히틀러의 《나의 투쟁》과 같은 제목인 칼 오베의 소설을 읽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것이 칼 오베와 그 아버지 사이의 투쟁에 대한 은유일 수도 있으리라 여겼다. 아버지에게 잔뜩 주눅 들어 있는 소년 칼 오베는 아버지의 일거수일투족에 혹은 자신의 행동이 일으킬 파장 특히나 아버지가 어떻게 반응할 것이냐에 예민하게 반응하다. 그리고 유추하자면 이러한 아버지와 칼 오베의 관계는 곧 그의 문학을 떠받치고 있는 하나의 기둥이 되고 있다.


“... 실제로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고, 세상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도 잘 알고 있지만, 우리가 이 세상을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세상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욕구를 가끔 느끼는데, 어떤 때는 그 욕구가 너무 커서 통제가 불가능할 때가 있다... 나는 이 욕구와 동경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글을 쓴다. 글을 씀으로써 세상 밖으로 향하는 문을 열고, 글을 씀으로써 나는 좌절한다. 미래를 찾아갈 수 없다는 것은 유토피아가 무의미하다는 말과 비슷하다. 문학은 항상 유토피아를 지향해왔다. 유토피아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면, 문학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말이 된다. 내가 시도했던 것은, 짐작건대 모든 작가가 한 번쯤은 시도해본 것이기도 하다. 픽션으로 픽션과 맞서 싸우는 일이다.” (p.338)


어쩌면 칼 오베는 이 소설을 쓰기 전 스스로가 만들어낸 허구를 통하여 허구와도 같은 이 세상에 대항하고자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이 소설 《나의 투쟁》에 이르러 만들어낸 실재 대신 자신의 실제를 통하여 하나의 세상을 구축할 작정을 한 것만 같다. 그리고 이토록 촘촘히 구축된 텍스트가 이룩한 하나의 문학이, 하나의 스타일이 세계를 이해하는, 인간을 이해하는 하나의 도구로 찬사를 받기에 이른 것은 아닐까 싶다.


“따지고 보면, 인간도 세상이 스스로를 표현해내는 여러 개체 중의 하나가 아니었던가. 세상이 스스로를 표현해내는 개체는 수도 없이 많다. 그중에는 살아 있는 것도 있고, 죽어 있는 것도 있다. 모래사장 위에 자리한 그물, 바윗돌, 흐르는 물처럼.. 나는 항상 삶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어둡고 매혹적인 것이 바로 죽음이라 믿어왔다. 이젠 그 죽음이 물이 새는 수도관, 바람에 부러져버린 나뭇가지, 옷걸이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져버린 옷 한 벌과 다름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pp.666~667)


자잘한 이야기들, 우리들 모두가 겪어내었거나 겪어낼 사소한 사건과 사고들, 그리고 깊거나 얕게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는 가족이나 친구, 그리고 그들의 삶이나 죽음을 끊임없이 가리키고 만지작거리는 칼 오베의 일거수일투족 그리고 그의 상념들을 읽어내는 일은 묘하게 매력적이다. 어찌 보면 사소설류라고 할 수 있을, 그러나 이 사소해 보이는 일상의 더께 안에서 뜻밖의 냄새를 풍기는 경이에 이르게도 될, 대하 사소설류라고 불러야할까 싶은 소설이다.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 Karl Ove Knausgård / 손화수 역 / 나의 투쟁 1 (Min Kamp 1, My Struggle 1)) / 한길사 / 675쪽 / 2016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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