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삶에 덧대는 대신, 삶에서 이야기의 형상을 길어 올리는...
“1958년 가을이었다. 아이들은 일곱 살, 다섯 살이었다. 슬레이트 색 강물 위에 햇빛이 쏟아졌다. 신의 게으름인 듯, 빛은 부드러웠다. 멀리 새로 놓인 다리가 한 줄의 선언처럼 빛났다. 편지에서 사람을 흠칫 멈추게 하는 문장처럼.” (p.28)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네드라와 비리, 벌랜드 부부는 바로 이때 스물 여덟과 서른이다. 네드라는 여전히 아름답고 비리는 자신의 일에서 성공 가도를 달리는 중이다. 이들에게는 프랑카와 대니라는 예쁜 두 딸이 있고, 친구들과의 교류도 활발하다. 주말이면 와인을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고, 서로에게 수시로 친근감을 표현한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다. 이들의 결혼 생활이 곧 하나의 자연 풍광, 이라고 말하여도 무방할 것 같다.
“그들의 삶은 미스터리였다. 숲과 비슷했다. 멀리서 보면 하나의 덩어리로 이해되고 묘사될 수 있었지만, 가까이 갈수록 흩어져 빛과 그림자로 조각났고, 그 빽빽함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그 안에는 형태가 없었고, 경이로울 정도의 디테일만이 어디나 가득했다. 이국적인 소리와 쏟아지는 햇빛, 무성한 잎사귀, 쓰러진 나무, 나뭇가지 꺾이는 소리에 달아나는 작은 짐승들, 곤충, 고요함, 그리고 꽃... 이 모든 것은 제각각이면서도 밀접하게 엮여 있고, 보이는 것과 달랐다. 실제로 이 세상엔 두 종류의 삶이 있다. 비리의 말처럼, 사람들이 생각하는 당신의 삶 그리고 다른 하나의 삶. 문제가 있는 건 이 다른 삶이고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것도 바로 이 삶이다.” (p.51)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는 현실 안에서 그것을 보는 데 한계를 지닌다. 제임스 설터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우리의 삶이 아니라, ‘다른 하나의 삶’을 보기를 원한다. 물론 그것은 원래부터 존재하는 삶이지만, 우리들이 쉽사리 내보이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못하던 삶이다. 제임스 설터의 소설은 억지로 돌을 쪼개 만들어내는 조각이 아니라, 원래부터 거기 돌의 내부에 있던 결혼의 형상을 찾아내어 하나의 조각을 만들어 내는 것만 같다.
“완전한 삶이란 없다. 그 조각만이 있을 뿐. 우리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났다. 모든 것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그런데 빠져나갈 이 모든 것들, 만남과 몸부림과 꿈은 계속 퍼붓고 흘러넘친다...... 우리는 거북이처럼 생각을 없애야 한다. 결의가 굳고 눈이 멀어야 한다. 무엇을 하건, 무엇을 하지 않건 그 반대는 하지 못한다. 행동은 그 대안을 파괴한다. 이것이 인생의 역설이다. 그래서 인생은 선택의 문제이고, 선택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되돌릴 수 없을 뿐이다. 바다에 돌을 떨어뜨리는 것처럼. 우리는 아이들을 가졌기에 이제 애 없는 부부가 될 수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우리는 온건한 삶을 살고 있다. 그래서 인생을 내던지는 게 어떤 건지 알 수 없을 거라고......” (p.67)
결혼은 우리 삶의 어느 한 순간에 치러야 하는 통과의례이면서 동시에 우리를 영원히 가두는 하나의 거대한 통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 안에서만 가능한 삶을 살면서, 그 밖의 불가능한 삶을 꿈꾸기도 한다. 이러한 기회비용의 욕망을 이율배반으로 몰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발생 가능한 문제들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소설 속 비리와 네드라가 그리고 그의 주변 사람들이 겪는 모든 문제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삶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삶이었고(적어도 삶을 위한 준비였거나), 다른 하나는 아이들을 위한 삶의 삽화였다. 그들은 서로 말없이 이 사실에 동의하고 있었다. 이 두 개의 버전은 서로 얽혀 있었다. 하나는 숨어 있고 다른 하나는 드러난 채...” (pp.113~114)
그저 우리는 우리가 걷고 있는 선 위에 집중하면서 산다. 그리고 헛디뎌 비틀거리고 때로는 떨어지기도 한다. 다시 그 선 위로 기어오르기도 하고, 떨어진 김에 아예 다른 선으로 넘어가기도 한다. 어쨌든 우리들의 삶이 단 하나의 선으로만 그 위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쯤은 알아 두는 것이 좋다. 물론 내가 하나의 선 위를 걷고 있을 때조차 우리는 그 하나의 선 위에만 서 있는 것은 아니다.
“비리는 집에 남겨졌다. 집 안의 모든 물건들이, 심지어 그가 손대지 않는 그녀의 물건들조차 그의 상실감을 느끼는 듯했다. 그는 갑자기 그의 삶과 헤어졌다. 사랑하든 하지 않든, 텅 빈 공가을 채우고, 부드럽게 하고, 가볍게 하던 그 존재는 이제 없었다. 이 여자에게 매달리고 싶다는 그 단순한 탐욕이 갑자기 그를 절박하게, 놀라게 했다. 치명적인 공간이 벌어진 것이다. 배가 부두를 떠났고, 갑자기 그 사이가 너무 벌어져 뛰어넘을 수 없게 된 것처럼. 눈앞에 모든 것들이 그대로 있는데 되돌릴 수가 없었다.” (p.299)
그렇게 비리와 네드라 부부는 그들이 사십대에 접어들었을 무렵 이혼을 한다. 비리에게는 당혹스러운 무엇이고, 네드라에게는 스스로를 자유롭게 만드는 무엇이기도 한 이 결별 뒤에도 이들의 삶은 계속된다. 네드라는 비리와의 유럽 여행에서 자신의 의지를 밝혔고, 이혼 뒤에 다시 영국으로 향한다. 비리는 자신들의 거처에 남겨진다. 옮고 그름의 문제로 치환할 수 없는 무엇이 두 사람을 갈라 놓았다.
“이 모든 것이 천천히, 지각하지 못할 속도로, 등을 돌리고 서있을 때 강물이 흘러가듯 그녀를 떠나고 있었다. 알고 있던 모든 것, 모든 사람들. 그래서 모든 슬픔과 행복은 그 사람과 묻히는 것이 아니라, 파편 몇 조각들만을 제외하고 그 전에 사라진다. 그녀는 잊힌 일화들과 이름은 잊힌 얼굴들 속에서 살았다. 자신이 창조했던 그 세상으로부터는 멀어진 채, 결국 그렇게 된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걸 밖으로 보이면 안 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아이들, 그들이 알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루하루, 고열같이 솟구치는 감정이나 만족감뿐 아니라 허망함과 공포까지 재료 삼아 그녀는 자신의 삶을 만들어갔다... 바보 같은 희망과 기대, 꾸민 것 같은 부자연스러움이 사라졌다.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할 때도 있었다... 이 행복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보다 못한 것은... 모두 포기하고 얻은 것이었다... 그녀의 삶은 그녀 자신의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 가져갈 수 없는 것이 되어 있었다.” (pp.374~375)
책의 원제는 Light Years 이다. 그러니까 광년, 빛의 속도로 가늠되는 어떤 시간을 지칭한다. 그것은 눈깜짝할 사이의 아주 빠른 시간이면서 그 시간 동안 날아가야 도착할 수 있는 아주 먼 곳을 떠오르게도 만든다. 한 권의 소설로 압축되어 있는 이들의 삶을 읽고 나면 Light Years 라는 제목이 아주 적절하다고 느끼게 된다. 우리들의 삶이란, 그리고 그 삶 동안 우리들이 맺는 관계들이란 짧은 시간 동안 우리를 아주 먼 곳에 가있게 만든다.
제임스 설터 James Salter / 박상미 역 / 가벼운 나날 (Light Years) / 마음산책 / 443쪽 / 2013 (1975)
ps1. 제임스 설터는 <파리스 리뷰> 와의 인터뷰 중 이 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은 결혼 생활의 마모된 비석들이다. 그 안에 이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과 아름답지 않은 것들, 결혼 생활을 풍요롭게 하고 시들게 하는 모든 것들에 관한 얘기다. 결혼은 수년, 수십 년씩 지속되지만 결국에는 기차에서 스쳐 지나가는 풍경과 비슷하다. 평원이 있고, 늘어선 나무들이 있고, 저물녘 창에 불 켜진 집들이 있고, 어두워진 마을과 기차역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종이에 기록하지 않은 것은 모두 사라진다. 다만 멸하지 않을 순간들, 사람들, 장면들이 있다. 동물은 죽고, 집은 팔리고, 아이들은 자라고, 그 부부마저 사라진다. 하지만 그 속에 시가 있다.” (p.442)
ps2. 제임스 설터의 소설을 읽고 나서 조금 가벼워지고자 일본 소설을 한 권 집어 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제임스 설터의 소설이 우리들의 치명적인 삶에서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방식을 취한다면, 일본의 가벼운 소설들은 만들어낸 치명적인 이야기를 우리들의 삶에 덧대는 방식을 취한다. 그래서 우리는 제임스 설터의 무심한 듯 사소한 일상의 이야기들에 깊이 반응하는 반면, 일본의 가벼운 소설들에 등장하는 치명적이고 경악스러운 이야기들을 읽으면서도 본질적인 긴장에 이르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