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시절의 시공간, 우리와 닮아 있어도 여전히 어렵기만 한...
꽤나 읽기 힘든 소설이다. 어지간하면 소설을 읽기 전에 그에 대한 해설을 읽지 않고, 이번에도 그렇게 했고, 후회했다. 시작 부분을 조금 읽다가 대체 이야기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머리를 쥐어뜯게 된다면 주저하지 말고 뒷부분의 해설을 읽으시라 권하고 싶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56년이라는 시간 그리고 동독과 서독으로 나뉘게 된 전쟁 후의 독일이라는 공간은, 비록 우리의 지난 역사와 겹치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소설을 신속하게 온전히 이해하는 일은 버겁기만 하였다.
“... 개인은 자기가 속한 시대 때문에 소위 자신의 독특한 활동 방식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 활동이라는 것은 오늘이고 이곳이며,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장 먼저 해야 하며, 그 활동은 미래를 요구하고, 게다가 과거의 품위도 요구한다.” (p.79)
사실 소설에의 몰입을 방해하는 것이 소설의 시공간적 배경은 아니다. 아직 베를린 장벽이 만들어지기 전 동독과 서독의 왕래가 비교적 자유로웠던 소설 속의 상황은 해방이 되고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 왕래가 가능하였던 우리의 남과 북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대화와 서술과 독백이라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세 가지 형식이 먼저 발목을 잡는다. 그리고 그보다 더한 것은 빈번히 대화와 서술과 독백의 주체가 명시되지 않은 채로 진행된다는 사실이다.
“... 사회적 생산이 지속적으로 개선되고 확장되면서 삶은 장차 더욱 더 안락해질 겁니다. 이건 필연적인 거죠. 그러한 논리를 위한 기본 전제는... 그건 우리한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잉여 가치를 관리하는 무리에게 달려 있어요. 우리 삶은 그들이 진보 가능성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달려 있어요...” (p.263)
제목에 등장하는 주인공인 야콥에 중심에 있지만 함께 피난을 온 야콥의 엄마, 이들을 거둔 하인리히 크레스팔과 그의 딸 게지네 크레스팔, 그리고 크레스팔에게 한눈에 반한 대학 교수인 요나스와 이들 전체를 감시하는 동독 비밀 경찰 슈타지의 요원인 롤프스는 아무 때고 소설의 어떤 형식에든 불쑥불쑥 등장한다.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 누구인지, 지금 설명되고 있는 것이 누구인지 알아내는 일이 쉽지 않다.
“... 현실은 눈앞에서 진행되는데 우리가 그 순간에 과학적 규정을 충족하는지 혹은 어기는지에 따라 현실을 평가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여하튼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는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너는 왜 서쪽으로 가지 않느냐는 질문은 이렇게 고치는 것이 적절하다. 너는 왜 여기 남아 있느냐.” (pp.326~327)
해설을 읽지 않는다면 소설의 중반부 정도는 넘어가야, 등장인물들의 관계에 대해 어설프게나마 윤곽이 잡힌 다음에야 이야기의 전체 맥락을 어림짐작할 수 있다. 오랜 시간 자신이 일한 철도청에서, 그러니까 수많은 기관차들이 지나가고 이들의 이동 경로를 조정하는 일을 하던 야콥이 왜 바로 그곳에서, 날씨가 좋지 않기는 하였으나, 죽었는지를 추측하는 일이 가능해지는 것은 소설을 읽기 시작하고 나서 한참의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가능한 것이다.
“... 그건 이런 말과 같다. 그러니까 강요된 결정은 결정이 아니라고. 의도 같은 건 상관없다. 의도라는 것도 주어진 환경에 대한 인식과 참작에 불과하다. 하지만 인간은 언제나 변할 수 있고, 믿을 만한 건 결정을 내린 사람들뿐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이런저런 일에 대해서도 결정할 수 있다...” (p.352)
패전 후 타의에 의하여 (미국과 소련이라는 승전국의 이해에 따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서로 다른 체제를 갖게 되었던 당시의 독일, 그리고 그렇게 나뉜 체제와 상관없이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면서 살아가던 개인인 야콥에 대한 추측은 그 시대에 대한 추측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 야콥에 대한 추측은,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느냐에 따라 선과 악으로 나뉘어야만 했던 양 체제, 이제 막 냉전이 시작되던 바로 그 시절에 대한 성찰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신은 그런 민주적이고 호의적인 태도를 포기하는 편이, 그러니까 두 개의 부조리 가운데서 무엇을 선택할지 물어보지 않는 편이 차라리 나았을 거예요. 다시 말해서 더 큰 악(惡)과 더 작은 악 둘 중에서 말이에요.” (p.353)
나의 경우 소설 보다는 소설가인 우베 욘존의 삶에서 보다 직접적으로 그 성찰의 계기를 얻을 수 있었다고 실토해야겠다. 우베 욘존은 어린 시절 ‘열성적인 히틀러 소년’이었다가 동독이 만들어지는 시기에는 ‘자유 독일 청년단 단원’으로 사회주의자 활동을 하였고, 이 소설을 발표한 이후에는 서베를린으로 이주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동독과 서독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고 중립적인 비판의 시각을 유지한 탓에 동독과 서독 양쪽으로부터 비난을 받거나 의심의 눈초리를 받아야만 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우리의 여러 정치인들과 김지하를 떠올렸다. 자신의 가치관 혹은 그 가치관을 떠받치던 신념에 등을 돌린 이후, 이제는 그 가치관과 신념을 향하여 침을 뱉거나 아직 그 가치관과 신념을 (변화시키며) 유지하려는 이들을 끊임없이 공격하는 것으로 존재의 이유를 찾는 이들의 역겨운 행태와 우베 욘존의 태도를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우베 욘존은 서독과 동독 양 진영으로부터 벗어나기로 작정하였고 1974년에는 영국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소설 속에서 여러 인물들을 포섭하려는 동독의 비밀 경찰, 그 슈타지에게 아내가 포섭되었고, 그렇게 감시당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는 경험을 하였다. 그는 영국의 해안가에서 홀로 지내다 마흔아홉 살의 나이에 죽었고, 그의 시신은 사망하고 십구일이 지나서야 발견되었다.
우베 욘존 Uwe Johnson / 손대영 역 / 야콥을 둘러싼 추측들 (Mutmassungen Über Jakob) / 민음사 / 389쪽 / 2010 (1959)
ps. 소설 속 독백과 대화와 서술이라는 서로 다른 형식들은 문단이 바뀌면서 모습을 바꾸게 되는데, 이때 문단 간격에서 한 줄 띄기가 되어 있으면 서로 다른 형식에도 불구하고 내용이 연결되는 것이고, 두 줄 띄기가 되어 있으면 내용이 구분되는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