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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 《무한화서 : 2002 - 2015》

어렵게 논하는 대신 스스로 감내하였던 마음의 흐름을 따라...

by 우주에부는바람

*2015년 10월 12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이번에 출간된 이성복 선생의 세 권의 시론집 《불화하는 말들》, 《극지의 시》, 《무한화서》를 모두 읽었다. 오랜 시간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또한 자신이 직접 시를 쓰면서 생각한 것들을 시론이라는 이름으로 묶어 내놓은 것이었고, 어려운 논리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알아차리고 감내하였던 마음의 흐름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읽는 데에 부담이 없었다. 시인과 시인을 둘러싼 이들(책의 완성에 도움을 주었을 학생들을 포함하여)의 노고 또한 느껴졌다.

책의 내용과는 별개로 아쉬운 점이 있다면 굳이 세 권으로 나눠서 출간해야 했을까 하는 점이다. 주로 학생들의 시창작 수업 시간의 강의 내용을 세 권이 공히 싣고 있는데, 시대순에 의하여 세 권으로 나뉜 것도 아니다. 《극지의 시》가 2014년에서 2015년의 강의를 (대담과 수상소감을 포함하고 있다) 다루고, 《불화하는 말들》은 2006년과 2007년의 강의를 다루고, 《무한화서》가 2002년에서 2015년까지의 강의를 다루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다보니 때로는 내용이 겹쳐지기도 하는데, 이럴 바에는 조금 두꺼운 한 권짜리 시론집으로 내도 상관없지 않았을까 싶다. 작년 2014년에는 열화당에서 이성복의 미발표 시집과 대담집과 산문집이 세 권으로 나뉘어 나왔는데, 그와 비교하여 질(의 우열을 가르는 것은 피하고 싶다)은 모르겠으나 양의 측면에서는 부족해 보인다. (어쩌면 이성복 선생은 3이라는 숫자에 조금 천착하고 있는 것일까...)

책의 제목인 ‘무한화서’에서 ‘화서’는 ‘꽃이 줄기에 달리는 방식’ (우리 말로는 ‘꽃차례’라고 한다고 한다. 예뻐 보이는 말이다.)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중 ‘무한화서’는 ‘밑에서 위로, 밖에서 속으로 피는 것‘을 뜻하는데, 저자는 이를 ’구체에서 추상으로, 비천한 데서 거룩한 데로 나아가는 시‘, 그러니까 그가 지향하는 시의 어떤 형태를 뭉뚱그려 지칭하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여하튼 이 세 권의 책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이 《무한화서》를 꼽고 싶다. 이번 책은 ‘언어’, ‘대상’, ‘시’, ‘시작詩作’, ‘삶’ 이라는 다섯 챕터로 구분되어 있으며, 각각의 장에 들어가는 내용은 아포리즘 형태로 정리되어 있다. 시와 관련하여 긴 시간 동안 꾸준히 생각하고 말하여 온 것들이, 그에게 강의를 들은 이들이 보관하고 있던 노트 속에서 세상으로 비어져 나왔다고 할 수 있겠다. 그것들 중 일부를 옮겨 보자면 아래와 같다.


“시의 한 끝은 아름다움과 추상이고, 다른 끝은 진실과 구체예요. 아름다움에 치우칠 때 의미는 희박해지고, 기호 표현의 질서로서 음악만 남아요. 그때 시는 귀로 들을 수 있는 것이고, 현재에서 미래로 향하는 거예요. 시가 진실에 몰두할 때 은폐된 것들이 폭로되고, 의미의 강도는 최고조에 이르러요. 그때 시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고, 현재에서 과거로 향하는 거예요. 시는 그 양 극단 사이에 있어요.” (pp.14)

“입말에 가깝게 쓰세요. 그래야 자연스럽고 리듬과 어조가 살아나요. 첫 구절만 봐도 머리로 썼는지, 입으로 썼는지 알 수 있어요. 입술로 중얼거리고 혀로 더듬거려보세요. 내용은 하나도 안 중요해요. 아니, 그렇게 해야 내용도 살아나게 돼요.” (p.25)

“멋있는 것, 지적知的인 것, 심오한 것 찾지 마세요. 피상적이고 무의미한 것에서 그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게 시예요. 사소한 일상보다 더 잔인한 건 없어요. 죄수를 발가벗겨 대나무밭에 눕혀 놓으면, 나날이 커 올라오는 죽순竹筍에 찔려 서서히 죽어간다고 하지요.” (p.58)

“한달음에 쓰세요. 생각이 들어가면 시간과 장소가 흩어지고, 사건의 흐름이 깨져요. 생각은 평소에 하고, 글 쓸 때는 아예 하지 마세요. 하지만 우리는 늘 반대로 하지요.” (p.73)

“시는 언제나 ‘젊은 시’예요. 시의 깊이는 불화不和에서 생기고, 시의 감동은 열정에서 나와요. 시가 만약 재능이라면, 우리가 무슨 수로 나비나 공작새를 따라갈 수 있겠어요.” (p.92)

“시적인 것은 일탈逸脫에서 나와요. 신경증이 곧 시는 아니지만, 시는 신경증적인 것이에요. 시는 일관성 있는 헛소리예요. 일관성만 있거나, 헛소리만 있다면 시는 자취를 감춰요.” (p.100)

“시의 중심은 자기 안에 있어요. 자기 방에 들어가는데, 쓸데없이 꾸미고 차려입지 마세요.” (p.121)

“시로 인해 우리는 하나가 여럿이라는 것과, 하나가 여럿을 가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돼요. 또한 인생에는 선과 악이 아니라, 성숙과 미성숙이 있을 뿐이라는 것도 알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성숙’이에요.” (p.171)

이성복 / 무한화서 : 2002 - 2015 / 문학과지성사 / 183쪽 / 2015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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