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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 《극지의 시: 2014 - 2015》

'읽는 사람'과 '대상'과 '쓰는 사람' 모두를 귀한 자리로 끌어 올리려

by 우주에부는바람

이성복의 시론집을 읽으면서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하다, 는 느낌을 종종 받는다. 나는 그래도 그저 즐겁게 이러한 느낌을 받아들인다. ‘알 듯’ 은 이성복의 영역일 테지만 ‘알 듯 모를 듯’ 의 영역은 온전히 나의 영역인 탓이다. 나는 그저 ‘모를 듯’ 의 영역으로 완전히 넘어가지 않도록 애를 쓸 뿐이다. 또한 이성복의 영역, 그러니까 ‘알 듯’ 의 영역에 맞닿았다고 여겨지는 부분들에서는 크게 좋아하기도 한다.


“사실, 우리가 어떤 대상에 대해 글을 쓴다 할 때, 대상이 우리에게 직접 말을 들려주는 건 아니잖아요. 그냥 대상을 핑계 삼아 우리가 자산의 얘기를 하는 것뿐이지요. 언제 꽃이, 나무가, 아파트가 성기性器가, 해와 달이 말을 한 적이 있었나요. 그렇다고 해서 대상을 무시한다는 말은 아니에요. 시란 ‘나’의 말이 대상에게 스쳐 굴절되어 ‘당신’이라는 불특정 다수의 독자에게 도달하는 것이지요...” (pp.20~21)


이 책 《극지의 시》는 시인의 2014년 후반과 2015년 초반 강의, 대담, 수상 소감 등을 엮어 놓은 것이다. 어쨌든 시인인 작가는 주로 시에 대해, 시쓰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그것을 이야기하기 위하여 여러 다른 이야기들을 끌어오기도 하지만 역시 그것은 시와 시쓰기에 대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시와 시쓰기를, 그리고 시와 시쓰기를 가르치는 일을 멈추지 않았던 시인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 제 사진이나 얼굴 표정을 보면 하나는 장난기 같은 것, 남 놀려 먹기 좋아하는 짓궂은 면이 있고, 다른 하나는 어떤 보잘것없는 것들에 대한 연민이나 안타까움 같은 것이 있는 듯해요. 그렇다고 아주 깊은 사랑 같은 걸 가진 건 아니고, 또 완전히 장난꾸러기나 날라리는 아니지만, 어떻든 그 두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하나 덧붙이자면 어떤 진지함이라 할까 하는 것도 있지 않나 생각돼요. 뭘 하게 되면 건성으로 하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이려는 태도 말이에요... 요컨대 진지함, 측은함, 장난기 이런 것들인데, 좀더 어렵게 이야기하면 그게 진선미眞善美가 아닐까 해요... 어떻든 이 세 가지가 지금까지 제 문학을 지탱해온 축이었던 것 같아요. 만약 진지함이 없다면 진실에 대한 지향이 없을 테고, 측은함이 없다면 윤리적 책임감 같은 것이 없을 테고, 장난기가 없다면 예술가라 할 수 없을 테지요.” (pp.89~90)


시인은 세 가지로 정리하여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이야기 보따리를 꺼낼 때도 한 개씩이아니라 세 개씩 한꺼번에 꺼낸다) 흑과 백으로 세상을 판단내리기보다는 균형과 조화를 통하여 아름다움을 분별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렇게 자신에 대해서도 진지함과 측은함과 장난기라는 세 가지 요소를 들어 표현한다. (그의 이미지의 어느 구석에 장난가 들어 잇는 것인지 찾기가 쉽지는 않지만 어쨌든...)


“시는 자기를 불리하게 하려는 거예요. 꼭 불리하게 만든다기보다, 억지로라도 대상 편에 한번 서보려는 것이지요. 비유하자면 갓난아기가 억지로 눈을 떠보려고 애쓰다가, 잘 안 되어 도로 감는 것. 우리가 살 수 있는 건 진실이 무덤 속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라 하잖아요. 시를 쓰는 건 우리에게 불리한 진실과 맞닥뜨리는 거예요. 그게 올바름이고, 그게 아름다움을 낳는 거예요... 가령 슬픔 앞에서 슬픔한테 우선권을 주는 거예요. 그러면 달리 슬퍼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러나 우리는 늘 자기한테 우선권을 주어요. 자기가 괴로우면 남도 괴롭고 자기가 더우면 남도 덥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항상 달라붙거나 밀쳐내고, 아 이건 좋아, 저건 싫어, 하면서 쉴 틈이 없는 거예요.” (p.102)


시를 쓴다는 행위는 결국 시를 쓰는 당사자인 자기 자신을 불리하게 하는 행위라는 시인의 말에도 좋은 울림이 있다. 많은 진실이 실제로 진실의 당사자를 불리하게 만들 수 있음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그 불리를 감내해야 한다는 시인의 태도는 시인이 아닌 자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그 불리를 통해서 자꾸 유리한 쪽으로만 해석하고 행동하려는 자기 자신을 통제하기 위해 애쓸 필요가 있다.


“어떤 시들은 자동차 깜빡이도 안 넣고 막 들어가는 것 같아요. 그러면 뒤에 따라오는 사람은 ‘식겁’하지요. 남들한테 하는 배려는 자기 자신한테 하는 배려예요. 그렇지 않으면 나도 다치고 남도 다쳐요. 시는 ‘쓰는 사람’과 ‘대상’과 ‘읽는 사람’을 귀한 자리에 두는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시를 믿어요. 시를 믿는다는 건 쓰는 사람과 대상과 읽는 사람을 믿는 거예요. 믿고 싶어 믿는 게 아니라, 믿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믿는 거예요...” (pp.144~145)


책의 마지막에 실린 대담에서, 요즘 사람들은 시를 안 읽는다는 인터뷰어의 물음 혹은 한탄에 시인은 위와 같이 대답한다. 시인은 ‘읽는 사람’을 탓하는 대신 읽는 사람과 ‘쓰는 사람’ 모두를 귀한 자리로 끌어올리고자 한다. 그러한 태도가 오랜 시간 우리들 읽는 사람의 마음에 가닿는 글을 쓰게 만든 원동력이었을 수도 있겠다 싶다. 나는 어쨌든 시인의 힘을 빼는 사회가 아니라 시인의 힘을 활용할 수 있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고 믿는다.



이성복 / 극지의 시 : 2014-2015 / 문학과지성사 / 145쪽 / 2015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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