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언어', '대상', '독자' 그 중 제일은 '언어'일지니..
이성복은 1977년에 등단을 하였다. 그간 여덟 권의 시집, 한 권의 시선집, 두 권의 산문집, 한 권의 아포리즘 모음집, 한 권의 대담집, 두 권의 사진 에세이, 두 권의 연구서, 한 권의 문학앨범을 냈다. 1982년부터 2012년까지는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의 목록에 최근 세 권의 시론집을 추가하였다. 세 권이 함께 출간되었으며, 각각의 제목은 《극지의 시: 2014-2015》, 《불화하는 말들: 2006-2007》, 《무한화서: 2002-2015》이다.
“시는 봉우리에서 봉우리로 건너뛴다는 말이 있지요. 산문은 골짜기를 다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방식이에요.” (p.23)
아주 오래 전부터 시를 쓰고 싶었다. 오래 전에 시를 쓰고자 하는 마음을 접었다. 얼마 전부터 시집을 다시 읽기 시작하였다. 최근에는 시를 쓰는 일에 생각해보았다. 글을 적고 있는 지금은 시를 읽는 일이나 시를 쓰는 일이나 시를 생각하는 일과 시를 읽지 않는 일이나 시를 쓰지 않는 일이나 시를 생각하지 않는 일이 한통속은 아닌가 여기게 되었다. 그렇게 여기고 났더니 이성복의 시론집을 읽는 일이 오히려 수월해졌다.
“수천 킬로 이동하는 물고기는 제 허리를 비틀어서 가는 거예요. 말이 제 허리를 비틀어서 가도록 하세요... 말이 장난치게끔 해야 생생한 리듬을 얻게 돼요... 언제나 ‘보이게끔’ 얘기해야 해요. 우리의 뇌는 ‘구체적 이미지’라는 산소를 공급받지 못하면 잠들어버려요.” (p.67)
이성복은 언어를 귀하게 여기는 시풍을 가지고 있다. 그의 스타일은 그야말로 그의 스타일이어서 아주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다. 물론 그 언어를 뿜어내는 자로서의 작자, 그 언어가 가 닿은 대상, 대상에 얹혀진 언어의 세례를 받는 독자, 이렇게 작자와 언어와 대상과 독자를 아우르는 이성복만의 스타일이다. 이번 세 개의 시론집을 차례대로 읽자면 그의 이러한 스타일의 비의를 조금은 엿볼 수 있다.
“시는 일차적으로 언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언어의 자장磁場 속에 우리가 동원되는 거지요... 언어 안에는 잊혀진 무언가가 숨 쉬고 있어요. 그것을 찾으려면 언어와 함께 숨 쉬어야 해요... 시인은 언어로 땅을 두드려 길을 찾는 사람이에요. 시인의 언어는 도굴꾼의 지팡이 같은 거예요.” (p.87)
특히나 그가 언어를 대하는 방식은 어느 정도 숭배에 가깝다. 그는 작자의 생각보다도, 작자의 생각이 가 닿은 대상보다도, 어떤 때는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일 독자보다도 언어를 앞자리에 놓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것들을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언어를 위해서 다른 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버리지 않기 위하여 언어를 취할 수밖에 없는 시인의 노릇을 이성복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손등이 까졌을 때 공기 중에서는 아픈지 모르지만, 물에 집어넣으면 따갑지요. 특히 소금물에 넣으면 더 쓰라리지요... 진실한 것, 올바른 것, 아름다운 것은 모두 그렇게 쓰린 거예요... 시로 들어가는 입구가 호기심이라면 시에서 나오는 출구는 쓰라림이에요.” (p.138)
시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 혹은 생각 없음과는 별개로 앞으로도 나는 시를 읽을 것이다. 시의 입구는 시나브로 줄어들 것이고, 시의 출구에 점차 무감해지겠지만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것이 그나마 생의 통점이 사라지는 속도를 줄이는 방법의 하나가 될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물론 여태 시를 쓰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이성복의 시론집은 또 다른 여운으로 다가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이성복 / 불화하는 말들 : 2006 - 2007 / 문학과지성사 / 141쪽 / 2015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