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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경 《너 없이 걸었다》

인간의 '해독할 수 없는 내면'을 향한 휴식의 염원 같은...

by 우주에부는바람

*2015년 월 23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 새로운 것들은 오래된 것들의 무릎에서 오랫동안 유아기를 거친다. 유아기를 오래 지속한 시대는 오래 살아남는다. 인간이나 유인원들이 자연 속에서 오래 살아남는 것을 동물학자들은 그들의 긴 유아기에 둔다. 어쩌면 한 도시는 유아기를 기억하면서 도시의 생명을 연장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p.143)


하나의 도시에서 이십여 년을 산다, 그것도 성인이 되어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떠난 이후의 일이다, 게다가 그 도시는 아주 오래된 (8세기 말에 도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도시이다. 한국에서 비행기로 열 시간을 날아가고, 다시 그곳에서 기차로 서너 시간을 달려가야 나오는 도시이다. 출판사 난다에서 나오는 ‘걸어본다’ 시리즈의 다섯 번째 이야기는 시인 허수경이 독일의 도시 뮌스터를 배경으로 쓰고 있다.


“... 고여 있는 물은 정적이 아니다. 나갈 수 없어서 비명을 지르는 무언가가 들어 있다...” (p.78)


책을 싸고 있는 겉껍질을 뒤집으면 뮌스터의 지도가 된다. (이 시리즈의 모든 책들의 겉꺼질이 모두 그렇다) 뮌스터는 정방형 모양을 하고 있다. 그 정방형 도시의 외곽 둘레를 작가는 푸른 반지라고 지칭한다. 원래는 도시를 방어하는 성벽으로 만들어져 있던 그 둘레가 이제는 푸른 가로수 길로 다시 만들어졌다. 읽다보니 이제 뮌스터라는 도시는 이 푸름에 의하여 보호 받고 있기도 하겠구나 생각하게 된다.


“좋은 일을 기억하는 것은 따뜻하지만 나쁜 일을 기억하는 것은 새록새록 아프다. 그 아픔을 견뎌내어야만 하는 것도 기억의 일이다. 기억하지 않고 묻어버린 공동체의 과거는 언젠가는 그 공동체에게 비수를 들이댄다.” (p.86)


시인의 말에 큰 기대를 하고 있었기에 책을 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실망하였다. 예리한 각도로 파고드는 시인의 말을 바라였지만 각도가 마음에 미치지 못하였던 듯하다. 하지만 책의 중반부를 넘어가면서 조금씩 마음에 드는 구절들을 발견한다. 그 사이 허수경은 기차역 사진, 칠기 박물관, 뮌스터의 방어벽이었던 푸른 반지, 츠빙어, 소금길, 람베르티 성당, 중앙시장, 옛 시청, 대성당, 루드게리 거리, 쾨니히 거리, 뮌스터아 강, 아호수, 쿠피어텔, 프라우엔 거리 등 뮌스터의 여기저기를 ‘걸어본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기억할 수 없다. 만일 우리가 모든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미쳐서 이 도시 어느 정신병원에 갇힐 것이다, 그것도 응급환자로. 하지만 기억은 인간의 내면에서 들끓는다. 사람은 그 자리에 없는데 사람의 기억만이 끓고 있는 무쇠솥이 한 인간의 몸이다...” (p.105)


까페 여름의 형과 나눈 이야기를 기억한다. 요즘 형과 대화를 한 몇몇 지인들이 요즘 핫한 장소로 독일을 제시하였다는 이야기였다. 에? 비정상회담의 다니엘을 볼라치면 독일은 그만 참 심심하기만 한 나라 같던데. 하지만 그 무겁고 철학적인 심심함이 오히려 부정적인 방향으로 끊임없이 액티비티 하기만 한 전지구적 추세에 힐링으로 작용하는 것일까. 책을 읽다가 잠시 샛길로 빠진다.


“... 죽은 이들은 우리들의 한 부분을 가지고 우리를 떠난다...” (p.132)


이 시리즈의 책들을 읽는 일을 일종의 휴식으로 받아들인다. (이 시리즈의 다음 책은 배수아가 쓰는 알타이 이야기이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개개인의 휴식이 잘 모이게 되면 인류의 평화로 이어질 지도 모른다고 여긴다. 2015년 8월 23일, 지금 남과 북은 치밀하게 대치 중이면서 동시에 협상 중이다. 남과 북의 위정자들에게 말하고 싶다. 제발 좀 쉬시라, 그저 열심히 일하면서 살아가는 나머지 사람들의 그나마 얼마 되지 않는 휴식을 위하여...


“성당을 둘러보며 많은 성자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누구든 평화를 원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데 왜 이렇게 극악한 일들이 이 세계를 메우고 있는 걸까. 그렇게 분쟁 없는 시간이 거의 없었던 인간의 역사를 돌이킨다. 참…… 인간이라는 종은 지구조차 해독할 수 없는 내면을 가졌구나!” (p.135)



허수경 / 너 없이 걸었다 / 난다 / 243쪽 / 2015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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