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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23. 2024

프레데릭 파작 레아 룬트 《짝 이룬 남녀는 서로...》

생활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움을 공유하는 이 부부의 풍경...

  부부인 프레데릭 파작과 레아 룬트의 글과 그림으로 만들어진 책이다. 아내인 레아 룬트가 그림을 그렸고, 남편인 프레데릭 파작이 그 그림에 곁들여 글을 곁들임으로써 (혹은 그 반대인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은 만들어졌다. 프레데릭 파작의 글도 좋지만, 레아 룬트의 그림도 마음에 든다. 흑백의 드로잉들이 묵직하다. 프레데릭 파작은 그림을 그리고 또 다양한 장르의 글을 쓰는 프랑스 작가로 소개되고 있고, 레아 룬트는 화가이자 조각가이며 또한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사진 작가로 전시회를 열기도하는 스위스의 아티스트로 소개되고 있다. 부부는 프랑스와 스위스를 오고가며 생활한다.


  “레아 룬트와 내가 함께 산 지 거의 25년이 되어 간다... 레아에게 그녀가 그린 그림 옆에 우리에 관해, 우리 부부의 삶에 관해 내키는 대로 글을 쓰겠다고 제안했다... 무엇보다도, 그 책을 <남여 한 쌍이 지나간다>로 부르겠다고 제시하자 레아는 이렇게 받아쳤다. <남녀 한 쌍이 지쳐 간다.>.” (p.11)


  책의 제목은 《짝 이룬 남녀는 서로 사랑한다.》인데, 어쩌면 《짝 이룬 남녀는 서로 사랑한다. 당연하다. 짝 이룬 남녀는 서로 미워하게 된다. 그럴 법하다. 짝 이룬 남녀는 서로를 파괴할 수 있다. 이는 아주 드물고 우발적이다. 또 짝 이룬 남녀는 영원히 서로에게 토라질 수 있다. 개 한 마리나 심리 분석가가 이들의 고약한 성격을 누그러뜨려 준다 해도 말이다.》라는 출판사가 선택한 제목을 줄인 것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여기에 ‘부조리한 커플, 프레데릭 파작과 레아 룬트가 쓰고 그린 짧은 독백들’ 이라는 부제가 따로 붙어 있다. 사실 조금 과하다. 이 책은 제목과 상관없이 매우 훌륭하다. 그리고 책의 원제는 L'étrange Beauté du Monde 이다. 


  “이것 하나는 확실하다. 그런 남녀 관계는 모두 수수께끼이며, 부서지기 쉽다는 것. 사랑은 증오와 섞이고, 애정은 권태와 섞이니 세상만큼이나 오래된 사랑의 약속이란 것은 희극인 동시에 비극이다. 아무런 규칙도 정해져 있지 않은 이 책에서는, 이미지와 문장이 섞이고, 때로 우리끼리 나눴던 이야기가 솟아오를 수도 있다.” (p.13)


  책은 주로 이 부부의 이야기이지만 마르크스와 그의 딸 혹은 그들의 공통의 친구나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불쑥 튀어나오기도 한다. (어쩌면 이것은 프레데릭 파작의 글쓰는 스타일일 수도 있다) 또한 프랑스와 이탈리아 그리고 남아프리카라는 공간을 자유롭게 왕래하기도 한다. 짐작컨대 부부인 두 사람은 굳이 어떤 것들을 공유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자연스럽게 생활하는데, 그들은 어쩌면 혹여 공유하는 것들이 있다면 생활이 아니라 자연스러움일 것이다. 그럼에도 책을 읽는 동안 문득문득 그들의 깊은 유대 혹은 끈끈한 연대를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우리는 이미 유혹과는 한참 멀어져 있다. 게다가, 우리는 늙어 간다. 우리는 오만 자잘한 병으로 힘들어한다. 우리는 죽는 게 두렵다. 우리는 각자 상대방의 죽음을 두려워한다.” (p.23)


  오래 전 아내는 자궁에 생긴 근종 제거를 위해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힘든 수술이기는 하였으나 문제가 생길 수 있는 위험한 수술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수술이 이뤄지는 동안 대기실에서 기다리며, 아무 신도 믿지 않는 나는 어떤 신이든 들어주길 바라면서 기도를 드렸다. 그제, 나의 아내가 목 디스크 치료를 위하여 시술을 받았다. 시술을 받는 동안 로비에서 기다렸고, 이번에도 작은 두려움에 시달렸다. 나는 죽음을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는 편이지만, 아내의 죽음은 역시 두렵다. 이 책의 무거움은 바로 이런 떠올림에서 연유한다. 하지만 그것이 진실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이 책은 어쩌면 진실에 대한 이야기이다. 


  “레아는 음악을 좋아하고, 나는 독서를 좋아한다. 레아는 움직이기를 좋아하고, 나는 의자에 못 박힌 듯 앉아 있기를 좋아한다. 레아는 밖으로 나가기를 좋아하고, 나는 안으로 들어가기를 좋아한다. 레아는 남자를 좋아하고, 나는 여자를 좋아한다. 레아는 물에 떠다니기를 좋아하고 나는 가라앉기를 좋아한다. 레아는 빈둥거리기를 좋아하고, 나는 일하기를 좋아한다. 레아는 사람들이 서로 알고 지내는 동네를 좋아하고, 나는 군중 속의 이름 없는 개인이기를 좋아한다. 레아는 쿠바, 멕시코, 에스파냐와 남아메리카 문화를 좋아하고, 나는 오지의 프랑스, 벽촌, 겨울비 내리는 이탈리아를 좋아한다. 레아는 조각을 좋아하고, 나는 회화를 좋아한다. 레아는 몸뚱어리를 좋아하고, 나는 얼굴을 좋아한다. 레아는 고독을 무서워하고, 나는 고독을 청한다.” (p.70)


  《짝 이룬 남녀는 사랑한다》는 이모저모로 좋은 책이다. 현재 부부인 이는 자신의 배우자를 생각하며 읽어도 좋다. 부부 관계를 이어가다 끝낸 이라면 이전 배우자를 떠올리며 읽어도 좋을 것이다. 싱글인 사람이라면 미래의 배우자를 상상하며 읽어도 나쁘지 않다. 이도저도 아니라면 그저 이 부부의 이야기를 읽는 것으로도 괜찮다. 이런 것들이 아니어도, 그저 프레데릭 파작의 담백하고 건조한 글을, 조금은 파괴적인 레아 룬트의 그림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도 있을 것이다.



프레데릭 파작 & 레아 룬트 (Frédéric Pajak & Lea Lund) / 짝 이룬 남녀는 서로 사랑한다 (L'étrange Beauté du Monde) / 미메시스 (MIMESIS) / 380쪽 / 2013 (2008)



ps1. 아마도 두 사라믜 최초의 만남을 떠올리며 쓴 글이라고 여겨지는 아래의 문장이 마음에 들어서, 나중 어느 때가 되면 나도 나의 아내와의 최초의 만남에 이렇게 적어보고 싶다, 라는 생각과 함께 옮겨 적어 본다. 

  “밤은 무정하다. 그녀는 공기로 배를 가득 채우고 요란하게 내쉰다. 그러면 그녀의 아이들, 우리처럼 그 침묵을 견디지 못하는 이들은 그녀의 따뜻한 몸뚱어리에 몸을 바싹 갖다 댄다. 그때가 사람들이 아무 이야기나 하는 시간, 각자의 자자한 불행, 속내 이야기, 신랄한 언사, 나아가 우정이나 애정이 가득한 다정한 말들을 털어놓는 시간이다. 우리, 레아와 내가 내리누르는 짐승의 품에, 별들이 촘촘히 박힌 어둠의 품에 매달려 서로를 사랑했던 건 바로 그런 때이다. 그러고 나면 우리는 이야기를 하며 여러 밤을 흘려보냈고, 그 밤들은 우리를 쓰다듬어 줬다. 그 당시 술집에 처박혀 있던 우리는 담배 연기에 눈이 따가웠고, 넌, 열기와 취기에 젖어 춤을 췄고, 술집 카운터에 눌러 앉아 있던 난, 우연히 만난 취객의 평범한 비극을, 비틀거리는 젊은 여자의 노골적인 수작을 들어줄 정도로 늘 컨디션이 좋았다.” (p.376)


ps2. 까페 여름 문 옆에 놓인 보드에 적혀 있던 아래의 문장이 좋아서 프레데릭 파작의 글을 읽기 시작하였다. 

  “... 만인이 만인을 불신하고 각자 자신의 진실이 진실이라고 주장하는데, 각자의 진실보다 더 나쁜 거짓말은 없다” (p.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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