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적으로 찾아 헤매는 얼굴, 토리노라는 거대한 고독의 거울에 비춰진..
대학 시절 문학회 후배 J는 니체를 흠모하였다. J는 여러 가지 기행을 일삼았지만 그것을 스스로는 기행으로 인식하지 못할 만큼 순진했다. 나는 J를 십여 년 전 쯤 마지막으로 보았다.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일반인과 다름없이 생활하는 스스로를 대견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5년 전 마지막으로 통화를 했다. 나는 그 전날 꿈에 J를 보았는데, 동양화 풍의 꿈 속 초라한 집에서 본 J가 위태로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죽음 직전의 J를 본 것처럼 놀랐고, 다음날 몇몇 후배를 거쳐 J에게 연락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모두 죽음의 체험 앞에서 초보자. 죽음은 난데없이 우리의 뒤통수를 친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우리 모두 태어나기 전에는 죽어 있었다.” (p.21) - 파베세의 일기 중
J는 핸드폰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그의 집으로 전화를 했다. 다행히 J가 직접 전화를 받았기 때문에 함께 산다는 J의 부모님을 거치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J가 집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다는 말을 다른 후배로부터 들었고, J로부터는 실은 자신이 난독증이라는 말을 들었다. 도무지 난독증이라는 것을 떠올릴 수 없어 난감해 하고 있는데, J가 작게 웃으며 그래도 괜찮다고 하였다. 얼마 전 자신이 한글은 읽지 못하는데 영어는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렇게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하였다. J의 글씨에는 혹은 글에는 남다른 멋과 맛이 있었다는 생각이 그때 떠올랐다.
“1889년 1월 초. 프리드리히 니체가 집 밖으로 나왔다. 마차 정류장에서 그는 마부에게 호되게 얻어맞고 있는 늙은 말을 본다(혹은 본다고 믿는다). 그는 대뜸 말의 목을 부여안고 눈물을 흘리며 키스를 한 뒤 뇌일혈로 쓰러지고 만다.” (p.205)
책을 읽고 얼마 후 니체가 등장하자 선뜻 J가 떠올랐다. 내게 토리노는 너무 멀었다. 만약 내가 2011년 벨라 타르 감독의 영화 <토리노의 말>을 보았다면 조금 달랐을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나는 그 영화를 보려다가 보려다가 보지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 그 영화를 보게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어쩌면 그 언젠가가 지금일지도 모른다고, 이 책을 읽은 다음 생각하게 되었다.
“언뜻 보기에는 모든 것이 서로 달랐다. 프리드리히 니체와 체사레 파베세는 만난 적이 없었다. 파베세는 니체가 죽은 지 8년 뒤에 태어났다. 한 사람은 불어와 이탈리아어로 꿈을 꿨던 독일인이고, 다른 사람은 미국을 동경했던 피에몬테 사람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가로놓인 심연은 무한히 깊을 수 있다. 그보다는 두 사람 간의 공통점을 보자. 예컨대 어머니, 누이, 그리고 아주머니와 할머니 등 여자들에 둘러싸여 살았던 이들은 여자를 사랑하거나 여자로부터 사랑받을 수 없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p.59)
책은 마치 세 사람이 쓴 것과 같다. 프레데릭 파작과 니체와 파세베가 그들이다. (그림은 한 사람, 프레데릭 파작이 그렸다. “토리노, 나는 이를 그림으로 그릴 수 없었을 것이다. 글로 옮기거나 묘사하는 것도. 사진을 찍을 수도. 자동차가 너무 많았다. 토리노, 그것은 데생으로 그려야 한다...” 파작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세 사람은 모두 이른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토리노...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잘못은 자살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만 하고 실행하지 못하는 데에 있다. 자살을 - 습관적으로 - 생각하는 것이 유발하는 정신적 해체 상태만큼 처참한 것은 없다.마치 파도가 칠 때마다 조롱당하는 장난감처럼 책임감, 양심, 힘, 이 모든 것이 사람을 집어삼킨 뒤 슬그머니 잔잔한 수면으로 돌아가는 죽음의 바다 위를 표류한다.” (p.300) 파베세의 편지 중
니체는 토리노에서의 광증 이후 십여 년을 정신병원에서 지내다 생을 마감하였고, 파베세는 토리노에서 자살하였다. 그리고 프레데릭 파작은 토리노에서 4년을 머물며 책에 실린 그림을 그렸고 글을 썼다. 사실 나는 책 속의 토리노에 가닿지는 못하였다. 토리노의 우울이 그 내밀한 고독이 버거워보였다. 이것은 내가 영화 <토리노의 말>을 선뜻 보지 못한 이유와 닮아 있기도 하다.
“...... 누구와 대화하든 간에 나는 나의 진정한 얼굴일 법한 것을 가리고 그 사람의 고유한 약점에 적합한 얼굴 표정을 취한다. 그러다 보니 진짜 내 얼굴이 어떤 것인지 모를 지경에 이르렀다. 설령 그런 것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제는 존재조차 하지 않는다.” (p.290) - 파베세의 편지 중
하필이면, 책을 집어든 시기가 좋지 않았을 수도 있다. 나는 몇 가지 문제를 동시에 처리하는 능력을 잃었다. 대신 한 가지 문제와 맞닥뜨리면 다른 일들까지 문제로 만들어버려 고민하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오래전 나는 사람들은 모두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떠들고 다녔던 것 같다. 가면을 벗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그저 그 다음 가면을 쓴 얼굴을 보고 있을 뿐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그렇다면 고민들은 이 가면 쓴 얼굴이 해결해야 할 터, 나의 맨 얼굴은 프레데릭 파작의 글과 그림을 보는 것으로 충분하겠다, 그것이 진짜 내 얼굴인지 아닌지도 모른 채로...
프레데릭 파작 (Frédéric Pajak) / 이재룡 역 / 거대한 고독 : 토리노 하늘 아래의 두 고아 니체와 파베세 (L'immense Solitude) / 현대문학 / 338쪽 / 2003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