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에 갇혔으되, 자신을 허명에 가두지는 않았던 듯한...
보르헤스는 1899년에 태어났다. 어쩌면 19세기의 마지막 인물일 수 있다. 그는 1986년에 죽었고, 나는 1988년에 대학에 입학하였다. 리얼리즘에 경도되었던 이십대의 내가 모더니즘을 건너뛰어 포스트모더니즘을 읽던 무렵 (이런 역설로 가득한 시대였으나 지금보다는 논리적이었으니 이 또한 아이러니이다), 처음 보르헤스를 접하였다.
민음사에서 나온 그의 전집의 첫 번째 권은 《불한당들의 세계사》이고, 1935년 처음 출간되었다. 민음사에서는 1994년에 이 책을 출간하였다. 민음사 전집의 두 번째 권인 《픽션들》은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이승우의 소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의 제목은 여기서 차용된 것이다.), 그리고 기교들 이라는 두 개의 챕터로 나뉘어져 있다. 1941년과 1944년에 나온 보르헤스의 작품들이 뒤섞여 있다.
이 작품집에는 보르헤스의 가장 유명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기억의 천재 푸네스>가 들어 있다. 소설 속의 푸네스는 모든 것을 기억하는 청년이다. 인류 전체의 기억보다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으리라고 장담하는 청년 푸네스가 주인공이다. 그리고 1955년 보르헤스는 약시였던 그의 시력을 완전히 잃었고, 그때부터는 어쩌면 (비서가 있기는 하였으나) 모든 걸 기억에 의지하여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민음사 보르헤스 전집의 나머지 권들은 《알렙》, 《칼잡이들의 이야기》, 《셰익스피어의 기억》으로 이어진다. 마지막 권이 1996년에 출간되었으니 모두 90년대에 나온 책들이다. 앞의 두 권에 비하여 나머지 세 권에 실린 소설들을 열심히 탐독했던 것 같지는 않다. 보르헤스의 세계는 한번쯤 여행을 다녀오고픈 곳이기는 하였으나, 나는 그곳으로 제대로 초대를 받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몇 년 전인 2012년, 보르헤스가 선정한 작가들과 보르헤스가 꼽은 작품들로 채워진 선집을 읽었다. 나는 그 선집을 통해 《보물섬》과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작가인 루이스 스티븐슨의 단편들을 좋아하게 되었고, 사키나 조반니 파피니라는 작가를 처음 알게 되었다.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를 다시 읽으며 기뻐하였으며, 볼테르의 〈미크로메가스〉나 도스토옙스키의 〈악어〉 등을 읽으며 환호하였다.
그리고 이제 보르헤스의 말, 을 읽었다. 책은 1980년을 전후한 시기, 보르헤스의 나이 여든에 즈음 하여 진행된 인터뷰 모음으로 채워져 있다. 몇 가지가 인상적이다. 보르헤스는 자신이 한 말이나 글을 인용하는 인터뷰어들에게 그것들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하고는 한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또한 자신을 향한 찬사에 대해 회의하고는 한다, 그렇게 유명할만한 작품을 써냈다고는 여기지 않는다는 듯이... 이러한 보르헤스의 몇몇 말들을 아래에 추려 놓았다.
“... 나는 살아오는 동안 적지 않은 책을 읽었고, 그걸 다시 읽는 경우도 많았어요. 1955년 시력을 잃는 바람에 더 이상 목적을 갖고 책을 읽을 수 없게 되었고, 그 후론 당대의 책들을 읽으려 하지 않았답니다. 나는 평생 신문을 읽지 않은 것 같아요. 우리에게 과거는 알 수 있는 것이지만, 현재는 눈에 띄지 않게 감춰져 있지요. 현재는 역사가들이나 스스로를 역사가라고 부르는 소설가들에 의해서 알려질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발생하고 있는 일들은 우주의 총체적 신비의 일부일 뿐이지요.” (p.16)
“... 잘못된 인연, 잘못된 행동, 잘못된 환경과 같은 그 모든 것들이 시인에게는 도구랍니다. 시인은 그 모든 것을 자신에게 주어진 것으로 생각해요. 불행조차도 말이에요. 불행, 패배, 굴욕, 실패, 이런 게 다 우리의 도구인 것이죠. 행복할 때는 뭔가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행복 그 자체가 목표이니까요. 그러나 우리에겐 실수가 주어지고 악몽이 주어지죠. 거의 밤마다 말이에요. 우리의 과제는 그것들을 시로 녹여내는 겁니다...” (p.23)
“... 작가의 경우 가장 좋은 것은 전통의 일부가 되는 것, 언어의 일부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언어는 계속되지만 책은 잊힐지도 모르니까요... 개인적인 생각을 말하자면 나는 야망이 없어요. 나는 나 자신을 하나의 실수라고 생각하지요. 사람들이 나를 너무 부풀려놓았어요. 나는 몹시 과대평가된 작가예요. 동시에 난 나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준 것에 대해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하고 있답니다. 난 그럴 자격이 부족한 사람인데 말이에요.” (pp.30~31)
“... 일이 진행되면 현재는 이내 과거가 돼요. 현재는 스르르 과거로 편입되지요. 나는 브래들리가 쓴 아주 멋진 책을 읽었어요. 『현상과 실재 Appearance and Reality』라는 책인데, 거기서 그는 시간을 강물로 표현했어요. 물론 헤라클레이토스를 비롯하여 울프의 『시간과 강 Of Time and the River』 등 여러 곳에서 그런 표현이 나오지요. 브래들리는 시간이 미래에서 우리를 향해 흘러오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우리는 항상 그 흐름에 맞서서 수영을 하죠. 미래가 과거로 변해가는 혹은 녹아드는 그 순간이 바로 현재의 순간인 거예요. 현재는 미래가 과거로 변하는 순간인 거죠...” (p.32)
“... 우리에겐 책이 있고, 그 책들은 사실 꿈이에요. 우리가 책을 읽을 때마다 책은 약간 다르고 우리 역시 약간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라는 어마어마한 상점에 안전하게 의지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나는 계속해서 그 안으로 찾아 들어갈 수 있기를 바라고, 그 안에서 내 삶의 물리적 경험이 더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p.40)
“... 책은 상상력의 연장이고 기억의 연장이에요. 책은 아마도 우리가 과거에 대해 알고 있는 유일한 것일 거예요. 우리들 개인의 과거를 포함해서 말이에요. 그런데 책은 뭘까요? 책은 서가에 놓여 있을 때... 많은 물건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에요... 책은 하나의 물건인데,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아요. 책은 독자가 오기 전까지 자신의 정체를 알지 못하죠...” (pp.122~123)
“... 많은 경험 가운데 가장 행복한 것은 책을 읽는 것이에요. 아, 책 읽기보다 훨씬 더 좋은 게 있어요. 읽은 책을 다시 읽는 것인데, 이미 읽었기 때문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고, 더 풍요롭게 읽을 수 있답니다...” (p.153)
『... 위대한 멕시코 작가인 알폰소 레예스는 “우리는 초고를 계속 수정하지 않기 위해 출판을 한다”라고 내게 말하더군요. 그의 말이 옳아요. 우린 책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걸 잊기 위해 출판하는 거랍니다. 일단 책이 나오면, 우린 그 책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리지요...“ (p.198)
『리드 : 내 질문은 언젠가 당신이 했던 정말로 중요한 발언으로 시작해요. “나는 허구(fiction)를 쓰지 않는다. 사실(fact)을 창조한다.”
보르헤스 : 그 문장은 당신의 선물인 것 같군요. 고마워요.
리드 : 언젠가 당신이 그 말을 했었다고 가정해볼까요?
보르헤스 : 내가 그 말을 했다며 잘한 거네요.
리드 : 네, 틀림없이 그렇게 말했을 거예요.』 (p.219)
“... 실비나 오캄포가 내게 말하길, 시인에겐 나쁜 시도 필요하다고 했어요. 나쁜 시가 없다면 다른 시들이 두드러져 보이지 않을 테니까요... 그녀가 말했어요... 그건 좋은 일이에요. 시인에게는 나쁜 시들이 있어야 해요. 이류 시인들이 오직 좋은 시만 쓴답니다. 정중히 말하건대, 당신에게도 나쁜 시가 있어야 해요... 시를 읽을 땐 감동을 받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시를 육체적으로 느끼지 않는다면 시를 전혀 느끼지 못한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런 사람은 교수나 비평가가 되는 게 낫지요. 나는 시를 매우 사적이고 중요한 경험이라고 생각한답니다. 물론 그걸 느낄 수도 있고 못 느낄 수도 있죠. 만약 느낀다면 그걸 설명할 필요는 없어요.” (pp.273~274)
“나는 그런 글들을 아주 오래전에 썼고, 지금은 여든이 넘은 노인이에요. 내가 쓴 글을 기억할 거라고 기대하면 안 돼요. 나는 내가 쓴 글을 절대 다시 읽지 않는답니다. 대신에 다른 훌륭한 작가들을 기억하려고 애쓰지요.” (p.312)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윌리스 반스톤 / 서창렬 역 / 보르헤스의 말 : 언어의 미로 속에서, 여든의 인터뷰 (Borges at Eighty) / 마음산책 / 360쪽 / 2015 (1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