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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23. 2024

오언 존스 《차브 : 영국식 잉여 유발사건》

이 나라의 과거와 현재가 우리의 현재와 미래일 수도 있는...

*2015년 6월 5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까페 여름에서 형 누나들과 가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고는 한다. 작년, 지금은 양평에 있는 H 누나가 아직 그곳으로 가기 이전, 한 번은 도대체 이 놈의 정부가 제대로 된 정부냐, 라는 투의 이야기들을 한참 나눈 적이 있다. 하지만 이야기의 대상은 곧 우리 바깥 세상으로까지 넓어져고, 현재의 이러한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는 것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우리에게만 국한시킬 수는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결국 이민을 가네 마네 하던 초반부의 투정은 지구에서 사는 한 별 수 없다는 체념으로 바뀌고 말았다고나 할까... 그렇게 세상은 그저 물신주의에 기반하였던 자본주의를 뛰어넘었다. 현재의 신자유주의적인 세계 경제는 인간의 욕망으로부터 그 진원을 찾을 수 있으나 이제는 그 욕망의 생산력을 극대화시키는 자본주의 체제로 진입한 것이 아닐까 우려하게 되는 것이다. 


  《차브》는 이러한 신자유주의의 선봉에 섰던 대처의 나라 영국에서 2011년 발간된 책이다. 책의 저자는 당시 고작 스물 여섯이었는데, 그 통찰력이 놀랍다. 신자유주의라는 일종의 시스템이 어떤 식으로 스스로를 견고화 하는지를 저자는 잘 (그리고 쉽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견고화를 설명하는 데 있어, 영국 내에서 회자되는 ‘차브’라는 단어를 이용한다. 애초에 ‘아이’를 의미하는 집시 언어인 차비Chavi에서 유래된 이 말이 어떤 식으로 노동 계급의 일부를 지칭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차브’라는 용어가 어떤 식으로 노동 계급 사이의 균열에 이용되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지배 계급에게 이용당하지 않기 위해 다시금 노동 계급적 가치를 세워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나 책을 읽으면 영국의 현재와 과거의 이야기들이 우리의 현재 그리고 (아마도) 미래와 오버랩 되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다. 가뜩이나 왜곡되어 있는 대한민국의 변태적이고 천민적인 자본주의는 항상 한발 늦게 세계를 따라가고 있으니 (하지만 이제는 간발의 차) 말이다. 다양한 인종(이라고 볼 수 있을까, 어쨌든 동남아를 비롯한 외국인의 유입 뿐만 아니라 조선족과 탈북자까지 포함한 다양한 외부 세력)의 유입,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 노동 계급 내의 서열화는 이미 우리의 현실이다. 또한 성적 소수자를 비롯해 여성 그리고 다양한 사회적 약자를 향한 조롱이 횡행하고, 각종 사회 계급적 문제들을 개인의 문제로 치환해버림으로써 하향평준화된 사회에서의 자신을 합리화시키고 사회 구조를 향해야 마땅할 분노를 또 다른 개인에게로 돌리는 태도 또한 만연해 있다. 그러니 책에서 전달하고 있는 이런저런 내용들을 저기 멀고 먼 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야기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가 없다. 읽고 새겨 놓아야 할 내용들이 적지 않다. 아래의 발췌문은 그 내용들 중의 일부이다.


  “... 그들 모두 ‘차브’란 특별히 노동 계급을 가리키는 모욕적인 언사임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를 가장 불편하게 한 것은 그 ‘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누가 그 말을 했으며 함께 웃었느냐는 것이다.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모두 연봉이 괜찮은 전무닉 종사자들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인정하든 안하든, 자신들의 성공에는 배경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들은 안정적인 중간계급 가정에서, 흔히 말하듯 나무가 우거진 교외에서 자란 사람들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조롱하는 그 수백년 묵은 현상을 목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pp.8~9)


  “... 2005년 처음 ‘차브’라는 말이 처음 콜린스 영어사전에 등재되었을 때, 그 말은 ‘캐주얼 스포츠 복장을 한 젊은 노동계급’이라고 돼 있었다. 그때부터이 말의 의미는 상당히 확대되었다. 급기야 차브가 ‘공영주택에 거주하는 폭력적인 사람들(Council Housed And Violent, CHAV)'을 뜻한다는 유명한 신화가 만들어졌다. 많은 경우 그 말은 신중하고 우아한 부르조아와 달리 소비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조잡하고 야만적인 방식으로 돈을 쓰는 노동계급을 향한 혐오감을 드러낸다... 무엇보다, 최근 거론되는 ’차브‘라는 단어는 폭력, 게으름, 청소년 임신, 인종주의, 주정 같은 노동계급의 부정적인 특징과 연결된다... 현재 그 말은 ’프롤레타리아‘ 또는 ’가난하기 때문에 쓸모없는 인간‘ 같은 폭넓은 의미를 가진다...” (pp.16~17)


  “이 책의 목적은 노동계급의 악마화를 폭로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간계급을 악마화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우리 모두는 이미 계급의 감옥에 갇힌 몸인데 계급편견의 감옥에 이중으로 갇힐 필요까지는 없다... 이 책이 목표하는 바는 ‘차브’ 풍자가 만연하는 가운데 그 존재가 지워져버린 다수 노동계급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계급편견은 계급을 통해 깊게 분열된 사회의 본질적인 면모다. 결국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편견이 아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편견이 뿜어져나오는 연못인 것이다.” (p.22)


  “영국 엘리트가 중간계급 사람들로 북적인다는 것은 어떤 이중잣대가 적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가난한 사람들에 의한 범죄는 하류층 사람들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지지만 중간계급 사람들의 범죄는 그렇다고 할 수 없다...” (p.48)


  “... 핵심은 사회에서 정치경제적 힘으로 존재하는 노동계급을 지워버리고 그것을 개이들, 또는 기업들의 집합으로 대체하며 각자의 이익을 위해 서로 투쟁하도록 하는 것이다. 아마도 지위향상을 목표로 삼는 새로운 영국에서 모든 사람은 사다리를 오르려고 열망할 것이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개념으로서의 계급은 제거된 반면, 실제에서의 계급은 강화되었던 것이다.” (pp.71~72)


  “... 대처리즘은 성공이 소유에 따라 측정된다는 새로운 문화를 촉진시켰다. 이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들은 도태되었다. 공동체를 발전시키기 위해 함께 일하는 인간이라는 열망은 사라졌다. 그것은 사회적 희생과는 상관없이 개인으로서 자신을 위해 더 노력하는 것으로 새롭게 정의되었다.” (pp.88~89)


  “삶에서 당신의 운명을 증진시키는 공식적인 길이 중간계급이 되는 것이라면 그 뒤에 남겨진 사람들은 무엇이 되는가? 확실히 모든 사람이 중간계급 전문직업인이나 사업가가 되지는 못한다. 대다수 사람들은 사무실이나 가게에서 사회가 돌아가는 데 필요한 일을 하는 노동계급으로 일해야 한다. 그러니 그들이 처한 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직업에서 벗어나는 데 주안점을 두는 것은 결국 그들을 부적합한 사람으로 내몬다는 뜻이다. 그래서 슈퍼마켓 종업원이나 청소부, 공장 노동자처럼 사회적 유동성에 의해 제공된 사다리를 타고 오르지 못한 의무태만자들을 보면 눈살을 찌푸리는 것이다.” (pp.139~140)


  “백인 노동계급을 사회적 계층이 아니라 인종적으로 정의함으로써 진보 성향의 차브 혐오주의자들은 노동게급의 문제를 경제적 요인이 아니라 문화적 요인에서 기인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다시 말해 차브들의 생활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 불공정한 사회구조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백인 노동자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들 자신이 무책임하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진보적 성향의 차브 혐오주의자들은 소수인종에 대한 전반적인 차별 때문에 실업과 가난, 그리고 심지어는 폭력과 같은 문제까지 발생한다는 것은 받아들이지만, 백인 노동자들도 그와 같은 차별을 받고 있다는 것은 믿지 않는다.” (pp.163~164)


  “문화는 정치를 반영한다... 대처 집권 기간 동안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 대처가 집권했던 시기는 ‘넘쳐나는 돈’의 시대였으며, ‘자기 자신을 돌보는’ 시대였고, 온갖 종류의 보석, 빨강색 멜빵을 맨 시티 보이(City Boys, 런던의 금융권에서 일하는 젊은 남성들을 일컫는 말 - 옮긴이)들의 시대 즉, 자본을 숭배하던 시대였다... 이후 노조의 수가 줄어들었고, 노동계급 문화 역시 위축되었으며, 노동계급의 문화를 향유하는 일도 줄어들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그러한 정치적 시기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p.198, 영화 감독 켄 로치의 말)


  『신경제학재단(New Economics Foundation)의 아일리스 로울러(Eilis Lawlor)의 표현을 빌리자면, 숙련된 일자리가 사라진 결과 ‘중간 지대’도 사라졌다. “노동시장의 양극화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보수가 좋은 제조업 일자리들이, 보수가 훨씬 형편없는 서비스 분야 직종으로 대체되고 있는 거죠.” 아일리스 로울러의 말이다. 다른 사람들은 이 상황을 ‘모래시계’ 경제라고 부른다. 한 끝에는 보수가 높은 고임금 일자리들이 자리잡고 있고 다른 끝에는 점점 더 수가 불어나는 저임금 비숙련 일자리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사이를 메우는 중간 일자리들은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다.』 (p.223)


  “현대 영국에 더이상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위선적 주장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정치가들이나 언론들은 실력과 열정만 있으면 누구든지 영국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실력주의를 칭송해댄다. 그러나 슬픈 아이러니는, 사회가 중간계급의 구미에 맞추어 부당하게 조직될수록 계급 없는 사회에 대한 신화가 힘을 얻는다는 사실이다. 영국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선명하게 계급으로 나뉘어 있다.” (p.247)


  “부유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삶의 안정망을 제공받는다. 설령 당신이 선천적으로 그다지 영리한 편이 못 된다 하더라도 여전히 성공할 가능성이 남아 있고, 적어도 성인이 되어서는 결코 빈곤을 경험하지 않을 것이다. 부모의 ‘문화자본’과 재정적 지원, 인맥으로 구성된 양질의 교육은 항상 당신을 도울 것이다. 그런데 만약 당신이 노동계급 가정에서 태어난 영리한 아이라면, 이런 조건들 가운데 어떤 것도 갖지 못할 것이다. 부모에 비해 처지가 나아지지도 않을 가능성이 높다. 영국의 계급 시스템은 보이지 않는 감옥과 다름 없기 때문이다.

  노동계급을 악마화하는 것은 비합리적인 시스템을 정당화하는 잔인하도록 합리적인 방법이다. 그들을 악마화하고, 그들의 이해관계를 무시하고, 그리고 극도로 불평등하게 이뤄지는 부와 권력의 분배를 사람들이 지닌 가치와 능력을 공정하게 반영한 결과라고 합리화하는 것. 그러나 이런 악마화는 훨씬 더 치명적인 의제를 갖는다. 오직 개인에게 책임이 있다는 교의는 특정한 노동계급 공동체들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 문제 전반에 적용된다. 그것이 빈곤이든 실업이든, 혹은 범죄이든 관계없이 그것은 개인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부서진 영국(Broken Britain)에서 희생자들은 자기 자신들 말고는 탓할 사람이 없다.“ (p.270) 


  “... 자유주의적인 다문화주의는 불평등을 계급이 아닌 순수하게 인종의 프리즘을 통해 이해해왔다. 이런 요소들이 합쳐지면서 결국 백인 노동자들은 다문화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 민족적 자부심과 유사한 관념을 발전시키고, 인종에 기초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구성하도록 고무받았다. 국민당은 백인 노동계급 구성원들을 이처럼 재앙에 직면한 사람들로 재정의함으로써 그들을 또 하나의 주변화된 인종적 소수자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p.333)


  “수백만명의 노동자들에게 있어 임금은 정체되거나 하락해왔다. 심지어 경기침체의 충격이 가해지기 전부터 그랬다. 그리고 이민은 오랫동안 임금하락의 원인 가운데 하나로 거론돼왔다. 그러나 제3세계의 이용 가능한 거대한 저임금 노동력과 불구상태에 빠진 영국의 노동조합 운동이야말로 임금하락의 훨씬 더 중요한 요인이다. 어찌 됐든, 회사의 이윤은 늘어나고 고용주들은 수십억의 돈다발을 쌓아두고 있다. 그들에겐 이윤을 나누라는 압력조차 없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화가 진전되고 노조의 권리가 박탈되는 가운데 진행되는 ‘바닥을 향한 경주’는 정치인들이 관심을 기울여온 이슈가 아니다. 은행가들의 탐욕과 뒤이은 정계 앨리트들의 재앙에 가까운 정책들이 빚어낸 경제위기 때문에 일자리들이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주류 정치인들은 현대 경제 시스템의 가장 근본적인 몇가지 가정들을 위협할 수 있는 어떤 질문도 던지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사람들의 편견에 호소하거나 우익 미디어의 떠들썩한 후원을 받는 부차적인 이슈들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p.360)


  “... 많은 정치인과 논평가들이 불평등을 유행처럼 찬양하고 있다. 이들이 볼 때 불평등은 선한 것이다. 경쟁을 촉진하고, 학설의 뒷받침을 받을 뿐 아니라, 부를 창출하는 것은 상위층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부를 창출하는 것은 상위층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p.372)


  “중요한 것은 노동계급이 우려하는 것들, 그러니까 지금까지 우파에 의해 냉소적으로 취급돼온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이민에 대한 대중의 적대감과 반발을 그저 무시하거나 인종주의로 비난하기보다, 거기로부터 응답없는 분노에 휩싸여 잘못된 길로 인도된 노동계급의 좌절을 현대의 계급정치는 읽어내야 한다. 이민에 대한 적대적 감정을 완화시키려면, 양호한 집과 일자리 부족 같은, 정말로 비난받아 마땅하고 전체 노동계급에 영향을 미치는 이슈들을 인지하고 적극 대처해야 한다.” (p.391)



오언 존스 / 이세영, 안병률 역 / 차브 : 영국식 잉여 유발사건 (CHAVS) / 북인더갭 / 427쪽 / 2014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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