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코 로카 《주름》

늙는 것 혹은 삶의 순환에 대하여 그리고 꿈에 대하여...

by 우주에부는바람

책에는 파코 로카의 두 편의 만화가 실려 있다. 표제작인 <주름> 그리고 <등대>이다.


「주름」


은행 지점장으로 퇴직한 에밀리오는 점차 기억이 흐릿해지고 있다. 저녁 식사가 차려진 상을 은행의 책상으로, 저녁 식사를 권하는 아들 내외를 은행에 방문한 손님으로 착각하기 일쑤이다. 결국 그 자식들은 에밀리오를 요양원에 모시기로 한다. 그리고 <주름>은 에밀리오가 요양원에서 보내게 되는 시간들, 그리고 그 시간들 안에서 조금씩 사라지거나 가까스로 되살아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전에도 말했지만, 요양원에서는 할 일이 정말 없어. 아침 9시에 밥 먹고, 1시에 점심, 저녁 7시에 또 밥 먹고, 여기서는 약이랑 밥 먹는 것밖에 중요한 일이 없어. 여긴 바깥 세상이랑 반대지. 밥 안 먹는 시간은 쓸모없는 시간이지. 자거나, 티비 앞에서 졸면서 다음 식사 시간이나 기다리잖아.” (p.34)


요양원에는 에밀리오 뿐만 아니라 다양한 노인들이 있다. 에밀리오와 같은 방을 쓰며 요양원의 대소사에 밝은 미겔, 라디오 방송 진행자였고 다른 사람의 말을 고스란히 따라하는 후안, 애들한테 전화를 걸고 위해 항상 전화기를 찾아다니는 솔레 부인,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이스탄불에 가는 기차 객석 안으로 여길 뿐인 로사리아 부인, 알츠하이머 환자인 모데스토씨와 이 모데스토씨를 돌보는 돌로레스 부인 등...


그리고 그 요양원의 이층에는 일상생활이 아예 불가능한 이들이 있다.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요양원이지만 이들은 그곳에서도 더 후미진 이층으로 올라가게 되는 것을 무엇보다 무서워한다. 이러한 이들을 등쳐먹는 것으로 보여지던 에밀리오의 같은 방 동료 미겔은, 그나마 다른 이들보다 정신이 또렷한 미겔은 이제 이들이 하고 싶어하는 마지막 것들을 충족시켜준다. 만화는 이렇게 점점 마지막으로 치닫는 이들의 마지막 시간을 그려내고 있다.


<주름>의 시작 부분에 부처의 말씀인 듯 ‘구름은 사라지지 않는다. 비가 될 뿐이다.’ 라는 글귀가 놓여 있다. 이 글귀가 내게는 윤회에 대한 언급쯤으로 읽힌다. 신을 믿지 않는 것처럼 윤회를 믿지 않지만, 그래서 나는 내가 늙고 쇠락해지면 온전히 그리고 말끔하게 사라지기를 원하지만, 어쩌면 딱히 윤회가 아니어도 우리들의 삶이라는 것은 내가 원한다고 해서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어떤 식으로든 다시금 누군가들의 삶을 통하여 남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윤회는 믿지 않지만 삶의 순환은 믿지 않을 도리가 없다.


「등대」


스페인 내전의 와중에 전투를 피하여 달아난 공화주의자인 소년 병사, 그리고 그 소년 병사를 거둔 등대지기 노인의 이야기이다. 내전으로 인하여 내상을 입은 많은 사람들을 대신하여 소년 병사가 꿈꾸게 되는 라퓨타, 라는 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제 등대지기 노인과 병사는 힘을 합쳐 밀려 바닷가로 떠밀려온 것들에서 재료를 구하여 배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제 배의 모든 준비가 끝난 순간, 소년 병사는 지금까지 노인이 한 모든 말이 그저 상상 속의 이야기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파시스트가 등대에 쳐들어온다. 노인은 파시스트들을 상대하며, 등대에 불이 나는 것을 감수하면서 불을 밝히고, 소년은 배를 타고 출항한다. 라퓨타 섬을 향하여...


만화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가난한 장사꾼과 경찰관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행복을 찾아 고향을 떠난 장사꾼이 결국 모든 것을 잃고 경찰에 체포된다. 경찰관은 꿈을 좇아 떠돌다 현재의 신세가 된 장사꾼을 어리석게 생각하며 보물이 묻혀 있는 야자수에 대한 자신의 꿈을 이야기해주고 나서는 그 장사꾼을 풀어준다. 그런데 이 장사꾼은 고향으로 돌아간 다음 이 경찰관의 꿈에 보였던 보물을 실제로 찾게 되고 자신의 꿈을 이룬다는 이야기이다. 책의 말미에 작가는 이것이 보르헤스의 소설 《꿈꾸는 두 사람의 야이기》에 나오는 ‘어떤 사람의 이루지 못한 꿈이 다른 사람의 꿈을 이루게 해준다’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힌다.



파코 로카 / 김현주 역 / 주름 (ARRUGAS) / 167쪽 / 중앙books / 2012 (주름 2007, 등대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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