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 삶의 모든 속도를 아우르며 바라보는 축조물들...
시속 250~350km 고속철도의 속도, 시속 100~150km 기차의 속도, 시속 80~100km 자동차의 속도, 시속 30~80km 모노레일 혹은렘 혹은 전차의 속도, 시속 20~30km 여객선의 속도, 시속 2~4km 걷는 속도, 그리고 모든 것의 멈춤... 이동을 하기 위한 많은 탈 것들, 그리고 자신의 두 다리를 이용한 이동까지, 여기에 멈추지 않고 완전한 멈춤이라는 묘지에 이르기까지, 건축학자인 저자가 우리들 인생의 모든 속도를 아우르며 전세계의 이곳저곳을 다닌다.
그 속도에 맞추어 건축가는 사유하고, 그 사유에 그 장소들의 건축물이 끼어든다. 이러한 사유의 기획, 책의 기획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건축이라는 장르에 대한 작가의 획득된 지식의 양을 그의 문장들이 제대로 사유하고 있지는 못하다는 느낌이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많은 것들을 설명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설명은 아직 어떤 깊이에 다다르지는 못하고 있다.
“... 나는 어릴 때 브루스 윌리스가 주연한 《블루문 특급》이라는 TV 드라마를 보며 탐정의 꿈을 키웠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블루문’이라는 사립탐정 사무소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건들이 너무도 흥미진진했고, 그런 짜릿한 삶을 사는 탐정의 삶이 부러웠다. 하지만 훗날 타이완에는 사립탐정제도가 없음을 알고 크게 실망했다. 기껏해야 흥신소 정도가 전부인데, 그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불륜사건을 캐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하지만 건축을 전공한 이후, 비록 탐정사무소는 개업할 수 없지만 개인적으로 ‘건축과 도시에 대한 탐정’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작은 실마리를 통해 그 도시의 성격과 특징을 알아가는 일도 꽤 스릴 있고 박진감 넘치는 일이었다.” (p.301)
물론 그렇다고 해도 전문가를 가이드 삼아 스페인, 미국, 프랑스 그리고 일본의 (대만 태생인 그는 지리적 여건 탓이기도 할 터인데, 책의 많은 부분을 일본에 할애하고 있다) 도시 풍광을 그리고 그 도시의 건축물들을 바라보는 것이 싫지는 않다. 우리들은 혹은 나는 언제나 여행을 꿈꾸고, 그 여행이 정확한 지식들로 각인되는 것이 나쁘지 않을 것이라 예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온전히 전문적이지도 않은 그렇다고 그저 풍광을 훑는 식도 아닌 이런 여행...
“일반적인 철도 레일에는 익스펜션 조인트 (열의 팽창 따위에 의한 본체의 손상을 막기 위해 자재 간 여유를 둔 것 - 옮긴이) 가 있어 운행시 ‘덜컹덜컹’하는 박자가 생긴다. 이 박자는 수면을 촉진하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기차에 타면 잠이 소르르 쏟아지곤 한다... ‘덜컹덜컹’하는 기차의 박자가 마치 평온한 상태의 심장박동 같다. 창밖의 풍경은 쉼 없이 창문에 어리었다 사라지면서 사고를 자극한다. 잔유물들이 가라앉은 뇌는 잔잔한 호수처럼 맑아지고, 잡념이 사라지고 나면 진짜 핵심적인 생각들이 속도를 높여 앞을 향해 전진한다. 이 순간의 뇌는 그 어느 때보다 맑고 민감하다!” (p.89)
마음에 콕 와서 박히는 문장들이 자주 발견되지는 않지만 위와 같은 부분은 아련한 어떤 정서를 자극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제 고속철도에 침식당하였으나 예전에는 일반적이었던 철도 여행에서 느낄 수 있었던 어떤 덜컹거림에 대한 소박한 감상 같은 것은 좋다. 자동차를 타고 다니기 시작한 이후 완전히 잊고 지내고 만, 지난 추억의 한 켠이 ‘덜컹덜컹’ 지금 막 내 옆을 스치고 지나간 것만 같다.
지난해, 가까운 곳의 선배와 이런저런 여행에 대해 꿈꾸었다. 물론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데, 아쉬운 것은 그 생각만 혼자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신 이런저런 여행기들만 독서들로 완료되었다. 그들의 여행이, 그들이 여행 중에 눈에 담은 것들이, 여행 중 그들의 상념으로 끼어든 것들이 내게 와서 가라앉았다. 언젠가 여행을 떠날 때 나는 내 아래를 한바탕 휘저어줄 것인데, 아마도 그때 내 여행은 신나게 뿌열 것이다.
리칭즈 / 강은영 역 / 여행의 속도 : 사유하는 건축학자, 여행과 인생을 생각하다 (旅行的速度)/ 아날로그 / 371쪽 / 2014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