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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린 《해변 빌라》

사려깊음이 부족한 감정과 더께가 부족해 보이는 시간만 가만히 흐르는...

by 우주에부는바람

파스칼 키냐르의 《빌라 아말리아》를 읽은 것은 거의 2년 전이다. 그럼에도 전경리의 《해변 빌라》라는 소설의 제목을 듣는 순간 《빌라 아말리아》가 퍼뜩 떠올랐다. 읽다보니 이래저래 겹치는 부분들이 있다. 주인공이 클래식 음악을 한다는 점이나 이들의 빌라가 위치하는 바닷가, 그리고 틀을 벗어난 사랑 같은 것들이 그렇다. 하지만 그 감정의 깊이에서는 차이가 난다. 《해변 빌라》의 그것이 좀더 얕아 보인다.


“... 모든 것이 여전한데도 무언지 달라졌다. 그 일 이후로 이린은 내게 친척이고 생모인 데다 한 명의 여자가 된 것이다. 요컨대 내가 이사경과 손이린 사이를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간파했다는 의미였다.” (p.49)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끌어가는 중심 역할을 하는 것은 손이린의 딸이자 조카, 그러니까 처음에는 작은 고모로 여겼으나 실제로는 손이린이 친모임을 알게 된 손유지이다. 그리고 그들이 머문 해변의 한켠 커다란 집에 이사경이 자신의 부인 그리고 노모와 함께 살고 있다. 이사경은 유지의 학교 선생님이기도 한데, 어느 날 불현 듯 천연덕스럽게 학교 빈 교실 이사경 앞에서 유지는 옷을 벗고 자신을 노출시킨다. 그리고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유지는 이사경과 손이린 사이를 ‘간파’하게 된다.


“... 간혹 옆구리가 열리며 타인의 세상이 흘러들어올 때가 있었다. 타인이 헛것이 아니라 자신과 똑같은 양의 실체를 가지고 나란히 살아가며, 자신이 살아가는 것을 나에게 느끼라고 요구한다...” (p.129)


하지만 뭔가 막장스럽고 울렁거리는 그 노출 사건이 소설 전반을 뒤흔들지는 않는다. 그저 그 사건은 이사경의 부인인 백주희나 이후 손유지의 음악 선생 노릇을 하게 되는 이사경의 노모를 등장시키는 역할을 할 뿐이다. 버려진 해변과 그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인간군상들은 마치 이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사람들처럼, 혹은 폐쇄적인 자신들만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처럼 별다른 동요 없이 살아간다.


“실은, 손 약사가 떠오르는군요. 둘이 닮았으니까. 뭔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 자족적인 얼굴이지요. 가끔 그런 얼굴이 있어요.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는 얼굴.” (p.157)


소설 속의 시간은 뭉텅이로 흘러간다. 어린 손유지는 삼십을 코앞에 두게 되었고, 그 사이 오휘라는 남자와 헤어졌다. 손이린은 손유지를 남겨 둔 채 일본으로 떠났고, 이사경은 여전히 그 집에 살고 있다. 유지와 비슷한 연배의 연조는 이혼을 한 채 환이라는 어린 아들과 함께 내려와 있다. 해변의 까페에는 해변의 사람들이 파도처럼 몰려왔다가 물러난다. 그렇게 바닷가에는 이것저것 이야기들이 남겨진다.


“... 기시감이 드는 순간이었지요.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일들이 늘 우리의 옆구리로 흘러가니까요. 희망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는 그렇게 대답할 거예요. 우리는 전과 조금 달라지기 위해 살아가는 거라고요.” (p.220)


솔직히 말하자면 전경린의 소설이 마뜩찮다. 작가 스스로 고백하듯, ‘감정과 시간(만)이 가만히 흐르는’ 소설이 되어버렸다. 그렇지만 이로 인해 이야기들이 바닷가의 쓰레기처럼 버려졌다는 느낌이다. 소설 속의 감정들에서 사려깊음을 느낄 수 없고, 시간의 더께들로 인한 묵직함도 없다. 일본의 사소설들이 보여주는, 그러니까 환타지한 이야기지만 군데군데 맞장구를 치게 되는 상황이나 그 상황에 부속되어 있는 감정들도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대중적으로도 힘이 부족한 소설이 되고 말았다는 느낌이다.



전경린 / 해변빌라 / 자음과모음 / 224쪽 / 201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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