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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운영 외 《누구나, 이방인》

온통 '소삽'해지는 마음으로 저물어가는 이때여서 적당한...

by 우주에부는바람

책은 여섯 명의 나름 핫한 작가들이 작성한 여행지에서의 기록을 모아 놓은 산문집이다. ‘느리고 낯설게, 작가들의 특별한 여행수첩’이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 급하게 지나쳐간 여행경로나 여행지에 대한 언급의 기록에 치우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구체적인 목적의식을 갖지 않고, 일종의 작가들을 위한 연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일정 시간 이상을 머문 도시에 대하여 그리고 그 도시에서 자신이 마주친 어떤 상념에 대한 길지 않은 기록들이라고 할 수 있다.


(비슷한 프로그램에 참가한 작가들이 그것을 책으로 내기도 하였는데, 기억나는 것으로 최승자의 《어떤 나무들은 - 아이오와 일기》, 한강의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이 있다. 두 작가 모두 아이오와 대학 주최의 국제 창작 프로그램에 참가한 것이었다고 기억되는데, 같은 프로그램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번 산문집의 이혜경 또한 아이오와 대학의 프로그램에 참가한 것으로 나온다.)


산문집에 실린 여성 명의 작가들과 여행지는 알래스카에서의 천운영, 폴란드에서의 조해진, 몽골에서의 김미월, 터키에서의 손홍규, 도미니까 공화국에서의 이혜경, 라오스에서의 신해욱으로 묶여 있다. 작가들 모두 어느 정도 인지도를 갖고 있고, 이미 필력으로 인정을 받고 있으니 그 글들 또한 일정 수준 이상은 보여주고 있다. 물론 애초에 이러한 여행의 기록을 책으로 남기겠다는 의도는 가지고 있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모든 비유를 지우자. 어떤 것도 빗대어 말하지 말자. 있는 그대로 옮겨놓자. 그것은 움직이는가 싶으면 멈춰 있었다. 느린가 하면 빨랐다. 가까운가 하면 아득했다. 덮치는가 하면 달아났다. 흐르는가 하면 얼어붙었다. 이 색인가 하면 저 색이었다. 고요한데 시끄러웠다.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진짜 오로라인가 아니면 눈의 착란인가. 시간도 공간도 속도도 질감도 색깔도, 그 어느 것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p.34) - 천운영의 <오로라를 보았다> 중


책에는 이처럼, 곰을 잡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알래스카로 떠난 천운영이 우연히 오로라를 보게 된 것처럼, 여행자의 눈에 사로잡힌 급작스러운 풍경과 사람들이 가득하다. 졸지에 이곳이 아닌 저곳에 있게 된 사람들이 가질법한 상념들, 설령 그것이 자신이 부러 선택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지워지지 않는 어떤 낯섦들이 가득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필력 좋은 작가들에 의하여 조근조근 전달된다고나 할까...


“... 이제 와 몽골을 회상하면 나의 기억을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그때 그 풍경들이 아니다. 사람들이다. 그때 그 풍경 속의 사람들. 풍경에 얽힌 기억은 앨범을 들춰봐야 재생되지만 사람에 대한 기억은 언제나 즉시 재생된다. 기억 속의 풍경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재구성하는 것 또한 사람이다. 그러니 여행의 시작은 풍경에 있다 해도 여행의 완성은 사람에 있다고 할까.” (p.105) - 김미월의 <몽골에서 부친 엽서> 중


이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손홍규의 글이다. 사실 다른 작가의 글들이 조금 감상에 치우치는 감이 있고 급하게 작성된 것 같다고 생각이 드는 데 반하여 손홍규의 글은 들떠 있지 않고 차분하면서도 하고자 하는 말은 모두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터키에서의 소소했던 일상의 기록뿐만 아니라, 야샤르 케말과 아지즈 네신이라는 두 명의 터키 작가를, 비록 일방적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벗으로 삼아 그들을 찾은 여정에 대한 기록이 좋았다.


“... 당신이 쓰던 소삽하다는 말은 두 가지 뜻을 지녔다. 서로 다른 한자어이지만 말에서는 두루 어울려 쓰는 듯했다. 그 한 가지는 ‘바람이 차고 쓸쓸하다’이고 다른 한 가지는 ‘길이 낯설고 막막하다’이다. 바깥이란 그런 곳이다. 바람이 차고 쓸쓸한 날이 아니어도 낯설고 막막하며, 낯설고 막막하지 않더라도 바람은 차고 쓸쓸하다.” (p.123) - 손홍규의 <벤 야자름> 중


전체적으로는 출판사의 기획에 마지못해 응한 글들 같다는 조금은 서걱거리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어쩌면 공들여 오로지 자신의 이름만으로 만드는 책과 다른 이들에게 조금은 기댈 수 있는 이런 기획 출판물의 차이일 수도 있겠다 싶다. 그렇다고는 해도 마음이 ‘소삽’해지는 한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 이곳과는 다른 이국에서 이들이 겪은 어딘가 막막한 심상을 들여다보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다.



이혜경, 천운영, 신해욱, 손홍규, 조해진, 김미월 / 누구나, 이방인 / 창비 / 230쪽 / 2013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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