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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 《열광금지, 에바로드》

허상을 향한 열광, 그 열광으로 점철된 에반게리온 세대 키드의 생애...

by 우주에부는바람

소설은 ‘42분 7초짜리 다큐멘터리 <열광금지, 에바로드>’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이 다큐멘타리는 사춘기 시절 ‘어머니의 가출’, ‘에반게리온과의 만남’, ‘인간에 대한 (심층) 탐구’를 세 꼭짓점으로 삼았던 1983년생 박종현의 삶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기자를 직업으로 삼았었던 저자가 <에바로드>의 연출자인 박현복, 이종호 씨를 인터뷰 한 후 사실과 허구를 7대 3 정도의 비율로 믹스하여 쓴 것이 바로 이 소설이라고 작가의 말에서 밝히고 있다)


『... ‘가난’이라는 단어가 1983년생이 속한 세대와 내 세대에게 다른 어감으로 다가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젊은 이들을 인터뷰하며 거리낌 없이 “집안 형편이 좀 어려웠나 보죠?”라는 질문을 던지곤 했는데, 이는 “혹시 유방 절제 수술을 받았습니까?” 정도로 무례한 질문이었던 셈이다.』(p.36)


소설 전체는 곧바로 기자 장휘영에 의한 박종현의 삶에 대한 인터뷰라고 볼 수 있다. 그렇게 오덕 양산의 전초 기지와도 같았던 ‘에반게리온’은 고스란히 80년대에 태어난 젊은 청춘의 삶과 겹쳐지게 된다. 그렇게 박종현은 사업이 망한 아버지와 가출한 어머니, 그리고 영민하지만 냉정한 형이라는 가족들에 둘러싸여 A.T.필드, 그러니까 에반게리온 속 ‘마음의 장벽’을 친 채 어린 시절을 보냈다.


“... 에반게리온은 ‘네가 겪는 고통은 특별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가 없고,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타인과 잘 소통하지 못하는 정도의 괴로움이 세계의 존망과 이어질 수도 있는 거였어요. 그건 중요한 문제였어요. 그런데 저는 어렸을 때부터 그런 아픔이 중요하지 않은 문제인 척 연기하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었고, 그런 가면을 벗어던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습니다. 미사토가 ‘진짜 나는 언제나 울고 있어’라고 말했을 때 저는 누구보다도 그 말뜻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pp.61~62)


그런데 이러한 박종현의 ‘마음의 장벽’에 균열을 일으켜 준 것이, 아니 ‘마음의 장벽’이라는 것의 정체를 알게 해준 것이 바로 에반게리온이었다. 그는 에반게리온을 통해 자신의 마음에 드리워져 있던 ‘마음의 장벽’의 실체와 맞닥뜨리기도 하고, 자신이 타인의 ‘마음의 장벽’을 허물어 뜨리는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했구나 깨닫기도 한다. 박종현에게 에반게리온의 가치관은 곧 세상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에서 신지는 결국 모든 인류의 A.T.필드를 무너뜨리고 아스카의 마음속을 들여다보잖아요. 그리고 그건 인간이 할 짓이 아니었죠. 우리 모두에겐 A.T.필드가 있다, 그 장벽 때문에 외롭고 슬프지만 그 벽이 사라지면 우리는 인간이 아니게 된다. 에반게리온 전체의 메시지는 이것 아닐까요?...” (pp.137~138)


그리고 그는 이제 에반게리온을 만든 스튜디오 카라에서 주최한 에반게리온 월드 스탬프 랠리에 참가하기로 하고, 아예 ‘남들이 인정해주지 않아도, 심지어 창작자마저 이해해주지 않더라도, 오덕질은 인생의 몇 안 되는 즐거움 중 하나다’ 라는 기본 주제로 무장한 채 <열광금지, 에바로드>라는 다큐멘타리를 찍음으로써 에반게리온과 함께 하였던 자신의 지금까지의 삶을 정리한다. 그리고 아래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였다, 라고 할 수 있으려나...


“... 에반게리온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결함투성이이고, 많은 이야기가 있는 듯하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없는 만화였다. 종현 자신의 청춘과 비슷했다.” (p.245)


장강명의 전작 《표백》이 주었던 묵직한 충격에 비한다면 조금 맥이 빠지는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표백》의 표백 세대에 이어 《열광금지, 에바로드》의 에반게리온 세대까지, 이 작가가 표적으로 삼고 있는 80년대생, 2000년대 이후 학번을 아우르는 세대에 대한 관심과 이해는 여전히 유의미해 보인다. 그리고 여전히 이 작가의 소설은 재미가 있다. (이 작품은 수림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데) 에반게리온을 한 편도 보지 않았음에도 끝까지 사로잡혀 읽었다는 심사평을 수긍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장강명 / 열광금지, 에바로드 / 연합뉴스 / 305쪽 / 201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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