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김경욱 《소년은 늙지 않는다》

아이러니와 풍자 가득하지만 왠지 밋밋하게 읽히는...

by 우주에부는바람

영화적 상상력이라는 프레임을 벗어던진 작가의 소설은 어딘가 밋밋해 보인다. 아이러니는 풍성하지만 돋보이지 않고, 풍자가 흘러 넘치지만 예리해 보이지는 않는다. 상상력의 날을 갈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한 듯, 서두르다보니 완성되지마자 허름해 보이는 새집을 보고 있는 것만 같다. 어딘지 모르게 맥락이 없는 어두운 농담을 듣고 있는 듯 꺼림칙한 기분인 것은 왜인지...


「스프레이」

“...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이해할 수도 없었다. 심장이 여태 벌렁거렸다. 심장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죄다 알고 있었다. 심장은 블랙박스였다. 그는 심장을 꺼내서 좀 전의 상황을 재생시켜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p.29) 가끔 꿈 속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다. 시작은 아주 사소한 행동이었다. 그러니까 아파트 경비실에서 잘못 가져온 택배 박스 하나... 그러나 이 작은 실수가 결국 살인으로까지 이어지는 운수 나쁜 나비 효과라고 볼만한 일련의 사건들로 이어지고 만다. 그 남자의 운수 나쁜 며칠에 대한 기록이다.


「개의 맛」

안과 김과 장... 그리고 이들이 함께 찾아 나선 어르신... 물건과 접촉함으로써 물건의 주인의 행적을 추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안, 상대방의 거짓말을 판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김, 스스로 전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장... 이들은 서로를 부장이라고 부르면서 자신들이 모셨던 어르신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이들은 아직 중국을 중공이라 부른다. 독재 시절의 인물들이 다시금 의기투합하여 그때의 그 어른을 찾아나섰지만 이제 그 어른은 아파트 경비원으로 시위 중이다. (어제 2014년 12월 19일 통진당 해산이라는 헌재의 결정이 있었다. 우리는 아직 이러한 풍자가 유효한 공안의 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빅브라더」

“... 나는 죄악과 심판에 대해 무시무시한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래야 나이 든 신도들조차 나를 우습게 여기지 못할 테니까. 그들의 죄의식은 나의 권위를 떠받치는 기둥. 혹 무고한 자가 있다면 죄의식은 나의 권위를 떠받치는 기둥. 혹 무고한 자가 있다면 죄의식을 심어주어야 했다. 마침 그날 설교의 주제는 원죄였다.” (p.103) 동네 서커스단의 공연 중 자원하여 인공대포알이 되어 한 번, 자신의 행동을 믿지 못하는 동네 아이들을 위하여 축대 위에서 또 한 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동생의 여자 친구를 앞에 두고 번지 점프대에서 또 한 번... 세 번의 자유 낙하를 경험한 형은 이전의 똑똑한 형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형을 대신이 물려받았어야 할 자리를 물려받은 나는 지금 목사가 되어 사람들에게 죄의식을 심어주기 위한 설교를 늘어 놓는 중이다.


「소년은 늙지 않는다」

얼어붙은 지구, 그리고 나이를 먹지 않는 소년, 소년은 이제 무너지기 직전의 아파트에서 할아버지와 살고 있다. 먼 길을 걸어 등교하고 그곳에서 얻은 급식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옥상에 설치한 비닐에서 물을 얻는다. 저녁에는 늑대들의 차지가 되는 아파트 놀이터에서 아이를 발견하고 그 아이를 집으로 들이기까지 소년이 가장 좋아했던 것은 불똥이 튀는 소리, 그러나 이제 소년은 아이의 숨소리를 가장 좋아하게 되었다.


「인생은 아름다워」

자살도 면허가 있어야 할 수 있는 세상... 자살면허를 따기 위한 학원에서 만난 김 여사... 자살면허를 따기 위해 치르는 시험장에서 만난 과거의 제자... 죽음을 위해 죽음의 면허를 따야 한다는, 면허를 따기 위한 학원에서 만난 인연, 면허를 따기 위해 치르는 시험장에서 그를 도와주는 제자... 일련의 아이러니로 가득한 소설인데 그 아이러니가 폭발하지 못하니 아쉽다.


「승강기」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는 아파트 저층부에 살고 있는 공은 관리비 내역에서 엘리베이터와 관련한 비용을 확인하고 이를 관리실에 항의한다. 하지만 이러한 공의 항의는 오히려 사람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게 되는데... 얼마전 있었던 난방 열사 김부선의 이야기가 얼핏 오버랩된다.


「아홉번째 아이」

학원 버스를 모는 노인 김 상사는 아이가 사라지고 난 후 형사의 방문을 받게 된다. 김 상사는 그간 자신을 해꼬지 하려 하였던 한 남자를 용의자로 여기지만 형사는 크게 믿지 않는 눈치다. 그리고 이제 그는 과거의 자신와 연관된 인물들을 떠올린다. 계엄 치하의 세상에서 자신의 군화발에 치었던 안경잡이, 김 상사의 여동생을 쫓아다니다 걸려서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건달과 같은... 그리고 사라진 아이는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


「염소의 주사위」

미안하다는 말로 해결되지 않는 일이 있다. 미안하다는 문자 메시지와 함께 해고 통보를 받은 나는 오래전 자신과 동생을 붙잡아 놓고 주사위를 던지게 했던 군인을 찾아나선다. 칼과 청산가리를 품은 채로... 주사위로 생사를 결정하려던 군인 앞에서 그 주사위를 삼켜버린 동생은 결국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나는 살아 남았지만, 그 삶은 마치 던져진 주사위 결과에 따라 정해지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구공정(地球工程)」

“... 율은 꿈을 꾸는 듯했다. 꿈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꿈. 꿈속의 자신을 바라보는 또 다른 자신을 율은 강렬하게 느꼈다. 꿈속의 자신을 바라보는 또 다른 자신도 역시 꿈속에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p.286) 킴과 율과 할로 이루어진 지구 탐사선의 대원들... 화성 탐사를 위한 전초기지로 달에 착륙했다가 지구가 멸망하고 그만 그곳 달에 머물게 된 사람들의 다음 세대인 이들은 이제 다시금 지구를 살피기 위한 여정에 올랐다. 근미래 SF라고 할 수 있을 것 같기는 한데...



김경욱 / 소년은 늙지 않는다 / 문학과지성사 / 314쪽 / 2014 (2014)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장강명 《열광금지, 에바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