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윤리는 절대적인가, 상대적인가?"
이 물음은 인류가 오래도록 고민해 온 문제다. 많은 사람은 윤리를 마치 수학 공식처럼 일정하고 변하지 않는 진리로 인식하고 있다.
예를 들어, "거짓말은 나쁘다"거나 "살인은 잘못이다" 같은 명제들은 어디에서나 통용될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역사와 현실을 들여다보면, 윤리는 결코 고정된 절대 기준이 아님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윤리는 사회의 맥락, 시대의 흐름, 인간의 인식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조정되어 왔다. 다시 말해, 윤리는 '가변적'이라는 것이다.
첫째, 과거의 윤리, 지금의 비윤리
역사를 통해 우리는 윤리의 가변성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스파르타는 유아의 생존 가치를 판단해 불구나 약한 아이를 버리는 것을 사회적으로 용인했다.
당시 스파르타 사회는 이를 윤리적 선택으로 여겼다. 하지만 오늘날 그런 행위는 명백한 아동학대이자 인권 침해로 간주된다.
마찬가지로, 중세 유럽에서는 마녀사냥이 정당한 "정의 실현"이었고, 명예살인은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기도 했다.
심지어 20세기 초반까지도 식민지 지배가 "문명화의 사명"이라는 논리 아래 정당화되며 윤리적인 책임처럼 묘사되었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이 모든 행위는 비윤리적일 뿐만 아니라, 인류의 수치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 시대 사람들은 그렇게 믿지 않았다. 그들에게도 '윤리'는 있었다. 다만, 그 윤리의 기준이 지금과 달랐을 뿐이다.
둘째, 기술이 던지는 새로운 윤리 문제들
현대 사회에서 윤리의 가변성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기술 발전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커지면서,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윤리 문제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가령, 인공지능(AI)은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윤리적 질문들을 낳고 있다. AI가 인간의 직업을 대체할 경우, 이는 경제적 효율인가, 사회적 책임 회피인가?
자율주행차가 사고 상황에서 "누구를 먼저 살릴 것인가"를 판단하게 될 때, 그 결정 기준은 어떻게 정할 것인가?
이런 질문에 대해 명확한 윤리 규범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 막 답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또한, 생명공학의 발전으로 인간 유전자 편집이 가능해지면서, 생명 윤리는 새로운 딜레마에 직면해 있다.
태아의 유전자를 조작해 질병을 사전에 제거하는 것이 가능한 시대에, 어디까지가 치료이고 어디부터가 개입인가?
"더 나은 인간을 만들겠다"는 명분 아래 특정 유전자를 선호하게 된다면, 그건 새로운 형태의 차별이 될 수 있지 않은가?
셋째, 윤리는 무작위가 아니다
윤리가 시대에 따라 변한다고 해서, 윤리는 제멋대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중요하다. 윤리의 변화에는 반드시 사회적 합의가 전제된다.
이는 곧 윤리의 가변성이 '혼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찰과 진화"를 의미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동성애에 대한 인식도 그러하다. 한때 동성애는 많은 나라에서 범죄로 취급되었지만, 오늘날 많은 국가에서는 법적 권리와 사회적 존중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변화는 단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 동안의 토론과 교육, 인권운동, 사회 변화 속에서 이루어진 결과다. 윤리란 그런 방식으로 진화한다. 시간이 걸리고, 저항이 있으며, 충돌이 발생하지만 결국 더 넓은 시야와 공감 속에서 재편된다.
넷째, 변화하는 윤리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
윤리가 가변적인 것은 불안한 일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사회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변화하는 시대 앞에서 우리 윤리는 고정된 지침이 아니라, 늘 다시 묻고, 다시 세우는 지혜다.
우리가 할 일은 윤리를 영원 불변한 도그마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 속에서 어떤 기준이 지금 "옳은가"를 끊임없이 성찰하는 일이다.
결국 윤리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만든 '약속'이다. 그 약속은 시대에 따라 바뀌되,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은 언제나 중심에 있어야 한다.
윤리가 변한다는 사실은, 인간이 끊임없이 고민하고 더 나은 사회를 꿈꾼다는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