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를 수용하고 자아를 비우는 삶
"이 또한 지나가리라"
고통 앞에서 위안이 되고, 기쁨 앞에서는 겸손을 주는 말이다.
이 문장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삶의 진실을 꿰뚫는 지혜로 여겨진다. 그 중심에 바로 불교의 핵심 개념인 "무상과 무아"가 있다.
모든 것은 변하고, 자아란 실체가 아니라는 이 두 가지 가르침은 인간 존재의 본질과 삶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되묻게 한다.
첫째, 무상 - 모든 것은 변한다.
'무상'이란 말 그대로 "항상 함이 없다"는 뜻이다. 봄은 여름이 되고, 어린이는 어른이 되며, 사랑은 식고, 권력은 바뀐다. 아무리 단단한 철도 녹슬고, 아무리 깊은 우정도 때로는 스러진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 변화를 두려워하고, 영원을 갈망하지만, 실상 세상은 어느 것도 정지해 있지 않다.
현대 사회는 '무상'을 부정하려는 욕망 위에 구축되어 있다. 미용 산업은 노화를 지우려 하고, 디지털 공간은 기억을 영구히 저장하려 한다.
우리는 변화 없는 사랑을 약속하고, 안정적인 일자리를 꿈꾸며, 평생 지속될 인간관계를 희망한다. 그러나 현실은 끊임없는 이동과 이별, 예상치 못한 변화의 연속이다.
무상을 받아들이는 순간, 삶은 오히려 선명해진다. 언젠가 끝날 것이기에 지금이 소중하고, 반드시 떠날 존재이기에 더욱 애틋하다.
어쩌면 진정한 행복은 "계속되기 때문에"가 아니라 "사라지기 전"에 깃드는지도 모른다.
둘째, 무아 - 자아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무아'는 좀 더 깊은 차원의 통찰이다. 인간은 '나'라는 확고한 중심이 있다고 믿는다. 내가 겪은 기억, 내가 가진 생각, 내가 맺은 관계들이 모여 나라는 존재를 형성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불교적 관점에서 자아는 실체가 아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인연과 조건들의 일시적 조합일 뿐이다.
오늘의 나는 어제와 다르고,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내가 아니다. 수십 년 전의 나는 지금의 가치관과도, 태도와도, 취향과도 같지 않다.
그런데도 우리는 끊임없이 "진짜 나"를 찾고, "나답게 사는 법"을 고민하며, "자기 다움"에 집착한다. 결국 이 자아에 대한 집착이 번민과 갈등의 근원이 된다.
SNS 속의 나, 이력서 속의 나, 타인의 평가 속의 나는 모두 일시적 이미지에 불과하다. 무아를 받아들이는 태도는 나를 낮추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라는 존재가 끊임없이 유연하고 확장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타인과도 고정된 방식으로 관계하지 않고, 변화와 흐름 속에서 더 진정성 있게 만날 수 있다.
셋째, 왜 지금, 무상과 무아인가?
팬데믹을 지나며 우리는 통제 불가능한 현실을 마주했다. 익숙한 일상이 무너지고, 예상치 못한 이별과 상실을 겪었다. 기후위기, 전쟁, 인공지능의 확산 등 세상은 갈수록 더 불확실해지고 있다.
이런 시대에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삶의 자세는, 어쩌면 무상과 무아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삶은 애초에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어떤 성공도, 어떤 관계도, 어떤 고통도 영원하지 않다. 이 단순한 진리를 이해하고 체화하는 것이야말로 지혜다.
무상을 받아들이면 삶의 모든 순간이 찬란해지고, 무아를 받아들이면 인간관계가 훨씬 덜 집착적이고 더 평화로워진다.
넷째, 삶은 흘러가고, 나는 비워진다.
무상과 무아는 허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가볍고 자유롭게 살아가기 위한 근본적인 깨달음이다.
꽃이 피고 지듯, 사랑도 피고 진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아를 지나치게 움켜쥐지 않는 태도는 우리를 더 유연하고 단단한 사람으로 만든다.
삶은 그 자체로 이미 충분하다. 붙잡으려 하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충만을 느낀다.
덧없기에 찬란하고, 비워져야 채워진다. 무상과 무아, 이 두 가지 지혜야말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가슴 깊이 새겨야 할 삶의 근본이 아닐까 싶다.
미국에서 딸아이가 오랜만에 귀국해 주문진 가는 길에 오대산 월정사에 들러서 -불자는 아니지만- 잠시 "무상•무아"를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