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태어나서 제일 먼저 '엄마'를 부르며 말하기 시작해서 죽을 때까지 쉼 없이 대화하면서 살아가지 않을까 싶다. 성향에 따라 주도적 또는 소극적으로 때로는 혼잣말을 하면서 뚜벅 뚜벅 삶을 수행한다.
통계에 의하면 "사람들은 대체로 듣는 것보다 말하는 걸 좋아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상대방이 말할 때 귀 기울여 듣기보다는 상대방이 말하는 동안에 할 말을 준비하는 경우가 많다. 귀와 뇌가 따로 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종종 대화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 끝내는 "당신과는 말이 안통한다"고 상대방을 탓하면서 자리를 박차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의견 차이는 상대방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상대방으로부터 배우는 좋은 기회로 생각해야 한다"는 멋진 문구는 단지 이론에 불과하다는 걸 자주 체감하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결코 쉽지 않지만 "대화할 때 몸이 빨려 들 것처럼 상대방을 향하면서 경청했다"고 하는 법정 스님의 대화 방법을 참고했으면 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경청의 기술'이라 평하기도 한다.
서점에는 언제나 대화에 관한, 소통에 관한 책들로 넘쳐난다. 많은 이들이 그 코너에서 머무는 걸 보면 우리 일상에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자녀와, 부부간에, 친구와, 때로는 연인 간에도 소통이 잘 안 되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상대방 관점에서 나를 보는 게 아니라, 나를 중심으로 상대방을 바라보기 때문 아닐까 싶다. 그러다 보니, 상대방을 '다르다' 생각하기보다 '틀리다'고 판단하게 된다. 또 틀리면 당연히 고쳐야 하므로 언쟁한다고 본다.
오죽하면 공자께서 "불혹이 된 사람한테 단점을 지적하면 멀어지는 지름길이다"라고 했을까 싶다. 수 십 년간 몸에 체화된 습관이 바뀐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얘기 다름 아니다.
법륜 스님이 자신의 나쁜 습관을 고치려면 그런 언행을 할 때마다 불에 달군 쇠붙이로 자신을 찌르라고 주문하는 걸 보면 습관을 바꾸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소통의 달인이 되는 기술은 생각보다 간단하다고 본다. 경청을 잘하면 되기 때문이다. 상대방 말에 고개를 끄덕여 주면서 경청하면 자연스럽게 소통되지 않을까 싶다.
사람에게 "귀가 두 개, 입이 한 개"있는 것은 경청의 또 다른 의미라는 걸 강조한다. 말 잘하는 비법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소통이 전제되면 당연히 말은 잘하게 되기 때문이다.
소통의 달인이 되는 2022년을 기대하면서 "경청"의 화두를 던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