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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광반조" 고찰

마지막 빛이 던지는 물음

by 송면규 칼럼니스트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향해 걷는다. 하지만 죽음의 순간을 직접 경험해 본 이는 없다.


살아있는 자는 결코 죽음을 증언할 수 없고, 죽은 자는 더 이상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경계선에 놓인 "마지막 순간"은 언제나 신비와 두려움으로 가려져 있다.


그런데 임종의 자리에서 자주 목격되는 특별한 현상이 있다. 오랫동안 의식이 흐려지던 이가 갑자기 눈을 또렷이 뜨고, 숨결이 안정되며, 심지어 가족의 이름을 부르기도 한다.


이내 몇 시간 혹은 하루 안에 세상을 떠나지만, 그 순간은 기이할 만큼 선명한 생의 불꽃처럼 빛난다.


동양에서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온 이름, 회광반조 - 꺼져가는 등불이 마지막으로 강하게 빛을 내는 순간을 뜻한다.


과학은 이를 생리학적으로 설명하려 한다. 신경전달물질의 분비, 신체 에너지의 마지막 집중, 뇌의 급격한 각성 현상 등이 그 배경일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이 모든 설명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을 지켜본 가족의 경험은 단순한 의학적 "반짝임"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삶과 죽음 사이, 존재와 부재 사이에서 열리는 짧은 문 같다.


생의 끝에서조차 인간이 관계를 확인하고, 사랑을 표현하며, 기억을 남길 수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철학적으로 회광반조는 중요한 물음을 던진다. 인간은 왜 죽음 앞에서 마지막으로 깨어나는가?


그것은 단순히 육체의 반사작용일까, 아니면 의식이 삶을 정리하려는 본능적 몸짓일까? 하이데거는 죽음을 "자기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이라 불렀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절대적 사건, 그러나 인간이 반드시 마주해야 하는 필연의 시간이다. 회광반조는 어쩌면 그 "고유한 가능성"을 스스로 응시하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삶은 직선이 아니다. 우리는 늘 앞을 향해 살아가지만, 마지막에는 반드시 뒤를 돌아보게 된다.


회광반조라는 말 자체가 "빛이 되돌아와 비춘다"는 뜻을 지닌다. 그것은 곧 자기 성찰의 은유다.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며, 마지막으로 자신의 존재를 비추는 시간, 그래서 회광반조는 죽음의 과정이 아니라, 인간다운 마지막 자기 이해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 현상은 남겨진 자들에게도 깊은 울림을 남긴다. 마지막으로 눈을 마주한 기억, 들리지 않을 것 같은 목소리가 불러낸 이름, 손끝에 전해진 온기, 그것은 죽음의 냉혹함 속에서도 삶이 끝까지 따뜻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죽음은 단절이 아니라, 빛의 형태로 남겨지는 관계의 마지막 표현이다.


우리는 흔히 "삶의 절정"을 젊음과 성공, 힘과 성취의 순간에 두지만, 어쩌면 진정한 절정은 마지막 빛을 내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가장 연약할 때 가장 강렬한 생명의 의미가 드러나고, 침묵 속에서 오히려 더 선명한 메시지가 남겨진다. 그것은 곧 인간 존재의 아이러니이자 숭고한 힘이다.


회광반조는 결국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마지막에 어떤 빛을 남기고 떠날 것인가?"


삶의 순간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끝까지 관계를 맺는 사람, 마지막까지 인간다운 사람만이 회광반조의 빛을 타인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길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오지만, 그 순간조차 우리는 단순히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다. 마지막에 되돌아오는 빛을 통해, 인간은 끝까지 인간으로 남는다.


그리고 그 빛은 사라지지 않고,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속에서 오래도록 반짝이며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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