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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돈' 그리고 '조광조'

살며 생각하며

by 송면규 칼럼니스트

신돈은 고려 공민왕 때 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개혁을 추진했던 인물이고, 조광조는 조선 중종의 신임을 받고 개혁을 추진했던 인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두 분 모두 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개혁을 추진했는데 왜? 군주로부터 버림을 받고 끝내 죽임을 당해야 했을까? 개혁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신돈은 '혁명가'와 '요승'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꿈속에서 어떤 사람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데, 그때 어떤 스님이 구해 주는 과정을 거치고 왕이 전격 발탁하면서 둘의 인연이 시작된 것 같다.


고려사에서는 "신돈은 득도하여 욕심이 없고 미천해서 친척도 없으니, 대사로 임명하면 반드시 정실에 구애되지 않고 일을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 인정하고, 드디어 일개 무명 승려인 그를 발탁해서 국정을 위임하고 의심하지 않았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신돈은 '청한 거사'라는 호를 하사 받고 왕의 신임을 얻어 백성을 위한 개혁을 펼치게 된다. 귀족들에게는 요승이었지만, 백성에게는 문수보살의 화신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신돈의 개혁정치가 권문세족들의 경제적 기반을 흔들게 되면서 그들의 강한 저항과 반격을 받게 된다. 그러면서 권력의 정점에서 밀려나 마침내 반역자로 참살되는 운명을 맞이 하게 된다.


"전에 대왕께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소승을 버리지 않겠다고 세서까지 써 주신 일을 벌써 잊으셨습니까? 오늘 소승을 닦달하시니 대왕의 맹세가 부끄럽지 않으신지요?"라며 죽기 직전까지 신돈은 역모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조광조는 유교적 이상 정치를 구현하려는 다양한 개혁을 시도했던 "시대를 앞서간 개혁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개혁정책은 기묘사화로 비록 물거품 되었지만 그가 꿈꾸던 이상 사회는 이후 후학들에 의해 조선사회에 구현되었다.


언급했듯이 신돈과 조광조의 개혁정책은 반개혁 세력들의 결집으로 절대 군주의 신임이 사라지면 개혁정치는 물거품 되고 추진했던 사람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시대를 앞선다는 것은 자칫하면 당대 사회의 대세와 충돌하게 되고 끝내는 당사자의 희생을 가져 올 우려가 크다는 것이다. 그래서 반토막 개혁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지 않나 싶다.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는 말을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개혁을 추진한다는 게 얼마나 어렵고 또 위험한 일인지 알 수 있다. 누가 감히 이런 불구덩이에 뛰어들려고 하겠는가. 대장부 중에 대장부 아닐까 싶다.


참고로, 조광조는 후세들에 의해 명예가 복원됐지만 신돈은 고려가 멸망하는 바람에 명예가 복원될 기회조차 얻지 못한 불운한 인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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