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 그리고 '설총'을 만나다
살며 생각하며
by 송면규 칼럼니스트 Dec 11. 2021
요즘 많은 사람이 '총체적 난국'이라고 한다. '국민이 주인'이라는 용어는 정치인들 연설용으로 한정된지 오래이다. 해서 어떤 '미사여구'를 사용하건 정치인들 언어에 사람들은 별 관심 없어한다. 오늘은 일상을 벗어나 신라를 방문해서 원효, 설총 두 분을 잠시 만나볼까 한다.
스님인 아버지를 두고 있는 아들이 아버지의 종교인 불교와 전혀 다른 유학을 택하는 건 왜일까? 많이 궁금하다. 그것도 불교가 절대적 가치를 갖고 있던 시대에 말이다.
아시다시피 원효는 신라 시대 고승으로 불법의 '오의'를 깨달음에 있어 특정한 스승에 의존하지 않았으며, 경학을 비롯해서 유학에서도 당대 최고의 선지식인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의상 대사와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서 '해골 물의 깨달음'을 얻고 발길을 되돌려 신라로 돌아왔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기고 있다.
한편 설총은 원효 대사와 요석 공주를 부모로 두고 있으며, 아버지인 원효가 입적하자 아버지의 뼈를 빻아서 진흙에 섞어 원효 대사의 모습을 본떠 '소상'을 만들어 분황사에 모셨고, 설총이 분향을 마치고 나가자 그 소상이 고개를 돌려 설총을 바라보았는데, 그 후 쭉 그런 모습으로 남아있다는 일화를 '삼국유사'는 전하고 있다.
설총은 신라 십현의 한 사람으로 한림을 지냈으며 주로 왕의 자문역을 맡았고, 국학과 유학을 깊이 연구한 학자이다. 특히 중국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적는 표기 방법인 소위 '이두'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왜 설총은 아버지인 원효 대사 뒤를 이어 불교에 귀의하지 않고 유학을 택했을까? 요석공주인 어머니가 처음에는 승려가 화랑에 버금가는 사회적 지위에 있었기에 아버지 뒤를 잇게 하려 했으나, 시대가 바뀌면서 승려들의 역할이 점차 축소될 것을 우려해서 아들에게 유학에 정진하도록 유도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필자는 조금 다르게 해석한다. 아버지인 원효가 가족과의 인연을 끊는 출가의 길을 걷는 바람에 어머니의 고통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어머니에게 효도하는 것만이 자신이 할 일이라는 깨달음이 설총을 유학자의 길로 이끌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특히 아버지인 원효를 만나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소유산에 들어와 조그만 별궁을 짓고 살면서 원효가 정진하는 곳을 향해 석 달 동안 매일 기도를 드렸으나 "나는 소요산의 신선이 돼 세속으로 향하는 발이 없어져서 내려가지 못한다"는 시종의 편지를 받고 코앞에 있는 남편을 만나지 못하고 천리길을 되돌아가는 어머니의 아픈 마음을 보면서 "이것이 출가자의 길인가" 회의했기 때문으로 해석해 본다.
설총은 신라의 고승으로 알려졌던 아버지의 삶에 경도되어 자신도 참선 수행의 길을 걸을까? 생각했지만,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까지 거부하는 불교에 회의를 느껴 집에서 보관하고 있던 전래되어 오던 불교 서적을 모두 불태우고 마음을 바꾸어 현실적 실용학문인 유학자의 길을 걷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구도자'는 왜 가족과 인연을 끊고 또 속세를 던지면서 도대체 무엇을 추구하겠다고 하는 걸까? 많이 궁금해진다.
"머릿속으로 알고 모르고의 경지를 벗어난 의미를 지닌다"라고 하는 '깨달음의 도'와 큰 간극이 있어서인지 필자에게는 잘 와닿지 않는다. "종교란 대체 무엇인가?" 두 분 선각자께 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