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디아스포라는 먼 나라의 이야기였고, 동시에 너무 가까운 현실이었다. 그것은 전쟁으로부터 도망친 난민들의 뉴스 속 이미지였고, 동시에 자국 내에서 '비자 없음'을 이유로 존재 자체를 의심받는 노동자의 실루엣이었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디아스포라’를 누군가의 상태로 여겼다. 낯선 타인의 이야기, 세계의 균열 속에서 태어난 예외적인 인물들. 그러나 21세기를 통과한 지금, 그 단어는 예외가 아니라 규범의 위치를 점령하고 있다.
디아스포라는 우리가 살고 있는 구조 자체의 감각이며, 이 세계가 인간을 분류하고 추방하고 배제하는 방식의 이름이다. 더는 “그들은 어디에서 왔는가?”라고 묻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
당신은 어느 장소에 도달하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는가?
국경은 단지 지도 위의 선이 아니다. 그것은 언어 속 억양, 피부의 톤, 문서의 유무, 기억의 방식을 통해 작동한다. 디아스포라는 그 모든 경계를 ‘겪는 감각’이며, 동시에 경계 자체를 열어젖히는 서사적 기술이다. 그것은 고정된 국적이나 혈통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가 세계 속에 어떻게 배치되는가에 관한 질문이다.
그리고 이 질문은, 무엇보다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강력하게 발화된다. 디아스포라 영화는 단지 이주와 경계의 경험을 재현하는 장르가 아니다. 그것은 이야기의 전개 방식, 이미지의 배치, 시선의 위치 그 자체가 디아스포라적 실천이 되는 형식 실험이다.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실제로 국경을 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스크린의 문법이 기존의 정체성 서사를 어떻게 비틀고, 어긋나게 만드는가이다.
이러한 영화들은 종종 허구와 다큐의 경계에 서 있으며, 주인공의 이력은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고, 종종 침묵과 공백이 주요한 구성 요소로 작동한다. 그것은 단지 ‘다문화’나 ‘난민’이라는 키워드로 환원되지 않는 보이지 않는 경계의 감각을 드러낸다. 어떤 영화에서는 인물의 국적이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어떤 장면은 대사가 없이 오랫동안 인물의 등을 보여준다. 그 등은 세계로부터 도망치는 등일 수도 있고, 어딘가로 향하는 등일 수도 있지만, 명확한 목적지 없이 떠돌고 있다.
이러한 시선은 디아스포라를 피해의 서사로 소비하는 관습에 저항한다. 더는 감정을 소모하지 않고, 오히려 관객의 위치를 의심하게 만든다. 보는 자로서의 ‘우리’는 언제든지 보이는 자가 될 수 있으며, 안전하다고 믿었던 정주성은 사실상 일시적 허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이 영화들은 질문을 하나의 정서적 교훈이나 ‘이해’로 마무리 짓지 않는다. 그것들은 이야기 자체보다 서사의 결여와 균열, 불완전한 망각과 뒤틀린 기억, 도달할 수 없는 좌표를 더 중요하게 다룬다.
그렇기에 디아스포라 영화는 플랫폼의 알고리즘이 분류하는 ‘감동적인 이주 이야기’로 읽히지 않는다. 그것은 슬픔을 보여주는 대신, 슬픔조차 포착되지 않는 상태의 구조를 폭로한다. 그 구조는 법이 될 수도 있고, 언어일 수도 있으며, 혹은 관객의 무의식 속 편견일 수도 있다.
인천에서 열리는 디아스포라영화제는 그러한 구조를 일시적으로 중지시키는 공간적 실험이다. 이 도시 자체가 이주와 정착, 기억과 망각이 뒤섞인 장소이기에, 그곳의 스크린은 단순한 상영장이 아니라 정동의 임시 거처가 된다. 바람이 불고, 사람들이 섞이고, 번역이 어긋나며, 이미지가 흔들리는 그 순간—우리는 영화가 보여주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느끼는 존재가 된다.
스크린은 단지 스토리를 투사하는 장치가 아니라, 정치적 감각을 재배치하는 장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위치를 바꾼다. 어딘가에서 밀려나온 존재들에 대해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그들과 동시에, 어긋난 방식으로 세계를 감각하려 한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비로소 디아스포라라는 말을 말이 아닌, 형식으로서 경험하게 된다. 이 영화들은 정착을 설명하지 않고, 추방을 낭만화하지 않는다. 다만 살아남는 방식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질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