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양 산업에서 길을 찾다.

1.1. 한국 숟가락, 젓가락의 가능성을 묻다

by Sam Lee

사양 산업에서 길을 찾다.


디자인과 인쇄소를 병행하던 시절,

나만의 제품 없이 다른 회사의 물건만 만들어 주는 인쇄업은 이미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었다.

오랫동안 해오던 일이었지만, 미래를 그려보면 막막했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지 답이 보이지 않았다.


그 무렵, 해외 수출을 많이 하던 거래처 대표와 저녁 식사하던 중 들려준 이야기가 내 마음을 파고들었다.

우연히 우리나라 젓가락을 외국 거래처 바이어에게 선물했는데,

그 젓가락을 아직도 사용하지 않고 집안에 귀하게 진열해 두고 있다는 것이다.

젓가락을 식탁에서 들면서 그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젓가락 한번 만들어 보면 어때요?

왜 한국에는 일본처럼 젓가락 전문 매장이 없고, 우리만의 젓가락 브랜드가 없을까요?”

resize_IMG_7021.jpg 방짜유기 수저세트(조선후기~일제강점기!)


순간 머릿속이 번쩍했다. 매일같이 손에 쥐고 쓰던 수저와 젓가락이,

그동안 단지 생활 도구일 뿐이라고만 생각했던 그 물건이,

사실은 한국 식문화의 상징이라는 걸 그때 처음 깨달았다.

그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왜 지금까지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을까.

이 작은 질문이 나의 시선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나는 곧바로 시장 조사를 시작했다.

먼저 눈길이 간 곳은 황학동에 있는 골동품 시장이었다.

주말마다 오래된 건물 틈에 들어선 상가 골목을 걸으며,

먼지가 내려앉은 유리 진열장 속을 들여다보았다.


진열 매장에는 조선 시대의 청동 수저와 젓가락,

더 거슬러 올라가 고려 시대의 수저와 젓가락 유물들이 놓여 있었다.

상인은 젓가락 몇 개를 조심스레 꺼내 손에 올려주었다.

금속 표면에는 세월이 남긴 작은 흠집과 무늬가 박혀 있었고,

손끝에 전해지는 묵직한 감촉이 오랜 시간을 말해주는 듯했다.


놀랍게도 내가 알고 있던 형태와는 많이 달랐다.

우리가 흔히 쓰는 납작한 단면이 아니라,

손에 착 감기는 입체적인 마름모꼴과 납작한 육각형 단면이었다.

이 작은 차이가 손끝에서 느껴지는 균형과 편안함을 완전히 바꿔 놓는다는 걸 알게 됐다.

그 발견은 내 마음속 깊이 새겨졌고, ‘이걸 꼭 다시 만들어 보고 싶다’는 열망이 생겼다.

젓가락.jpg 골동품 시장에서 구입한 황동 숟가락, 젓가락


처음에는 내 힘으로 만들 자신이 없어 숟가락 공장을 찾아다녔다.

숟가락 공장은 찾기 힘들었지만,

몇 해 전 TV 프로그램 ‘생활의 달인’에서 본 현보산업 이야기가 떠올라 직접 연락했고,

그 길로 첫 수저 공장을 방문했다.


기계 소리가 울려 퍼지고, 공장 안에는 출하를 앞둔 스테인리스 수저세트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하지만 기성 제품을 그대로 사용하는 외주 가공 방식은 한계가 뚜렷했다.

공장에서 가지고 있던 기존 수저에 세라믹 전사를 입혀 세 가지 디자인을 만들었고,

최소 주문 수량이 각각 1만 개라고 해서 무리하게 총 3만 개를 생산했다.

기와무늬수저.jpg 세라믹 전사를 입힌 기와무늬 수저세트


전시회와 인터넷 쇼핑몰을 통해 판매는 시작됐지만, 판매 사이클이 너무 길었다.

매출이 들어오는 속도보다 재고를 보관하고 관리하는 비용이 더 빨리 늘어났다.

창고 구석에는 팔리지 못한 제품과 패키지 박스가 쌓여만 갔다.

결국 악성 재고가 되었고,

인쇄소 수익으로 손실을 메우며 버텨야 했다.


홍보 효과를 기대하며 원가 이하로도 팔았지만, 손해는 피할 수 없었다.

전시 부스에서 몇몇 외국인 바이어가 제품을 흥미롭게 살펴보고,

“디자인이 참 독특하다”는 말을 해주었지만,

주방용품 유통을 전혀 모르고 시작한 나에게는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 실패를 계기로 외주 제작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기물 설계부터 패턴 디자인까지 직접 손에 쥐었고,

숟가락과 젓가락의 기물은 외주 제작을 병행했다.

그리고 과감히 고가의 레이저 마킹 기계를 들여와 작은 기념품 시장부터 다시 시작했다.


패키지 디자인부터 시작해,

제품 표면에 레이저 마킹으로 문양을 새기고,

완성된 젓가락과 수저를 하나하나 직접 포장했다.

포장 박스의 질감과 색감을 고르고,

완성된 제품이 담겼을 때의 인상을 세심하게 살폈다.


포장 작업대 위에는 인쇄된 박스와 속지, 완성품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고,

하루에도 수십 번 패키지 박스를 조립하며, 라벨을 붙이고, 완성품을 정리했다.

이 과정은 단순한 포장이 아니라, 한 벌의 수저가 소비자에게 닿기 전 거치는 마지막 손길이었다.

내 손을 거쳐 세상으로 나가는 물건이라는 사실이, 작업의 무게를 더 크게 느끼게 했다


돌아보면 그 시절의 무모함이 오늘의 나를 만든 기초였다.

기성 제품 위에 그림만 얹던 단계에서,

금속과 직접 씨름하며 형태와 구조를 설계하는 신제품 금형 제작 단계로 나아간 것.

그 수많은 시행착오와 손해,

그리고 끝까지 놓지 않았던 고집이 결국 지금 내가 만드는 수저의 출발선이 되었다.


chosticks.jp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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