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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훈실 Aug 02. 2023

순간수집가

매일의 ㅎ을 찾아서

 

인터넷 서핑을 하다 흥미로운 글을 만났다. 오늘의 행복했던 순간을 딱 하나만 발견해 사진으로 올리고 그에 대해 짧은 일기를 쓰기 챌린지였다. 나도 나만의 챌리지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 행복의 순간을 발견하기로 마음먹자 주변의 사소한 것들이 새롭게 보였다. 

#1 후박나무 가로수가 새잎을 내고 맹렬히 자란다. 촛대 같은 새순을 밀어 올리며 겨우내 입었던 외투를 훌훌 벗어던진다. 새로운 나무로 탈바꿈하는 성장이 눈부시다. 나 홀로 에고의 외투를 두른 겨울 사람은 아닌지, 한 뼘 우뚝한 나무 그늘 아래서 돌아본다. 신생(新生)의 발돋움은 살아있는 모든 것을 향한 신의 미소다.

#2 유독 병마개를 잘 따지 못한다. 요즘의 뚜껑은 너무 견고해서 웬만한 악력으론 열리지 않는다. 병마개뿐이랴. 택배 박스를 열 때 테이프를 떼 내기도 여간 힘들지 않다. 배달의 민족답게 포장도 이토록 야무진 것인가. 하지만 지나침은 부족함만 못하다. 손힘이 부족한 약자를 배려한 포장이 아쉽다. 비타민 음료를 마시려고 낑낑대는 내게 고등학생이 다가오더니 단번에 따서 건넸다. 후련하고 고마웠다.

#3 비 오는 날이면 부엌 베란다 문을 열어둔다. 빗방울 난타를 듣기 위해서다. 가스관 연통을 두드리는 빗소리는 청량하고 경쾌하다. 어릴 적 동생과 나는 처마 밑을 처벅처벅 걸으며 장난을 쳤고 그것도 시들하면 빗방울이 그리는 동심원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사선으로 내리는 비가 고인 물을 만나 톡톡 터지는 소리, 호박잎이 넙디넙디 자라는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지금은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옛 빗소리를 듣는다. 아파트촌에서도 자연은 여일하다. 다행이다.

#4 동네를 천천히 걷는다. 단독주택과 골목이 남아 있는 동네는 내 호기심을 무한 자극한다. 담장 밖으로 능소화가 폭포처럼 쏟아지는 집은 어쩐지 다정해 보인다. 하늘과 구름과 새와 사람에게 날마다 주홍빛 연서를 쓰고 있으니까.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한 골목에선 빛과 그림자가 사이좋게 땅따먹기 놀이를 한다. 누가 이기는지는 관심 없다. 골목에 가득했던 꼬맹이들이 그리운지 해거름엔 눈시울을 붉히기도 한다. 담쟁이가 기어오르고 네모 플라스틱 통에 상추와 고추가 자라는 동네는 이제 눈 감고도 그릴 수 있다. 

#5 손에 착 감기는 볼펜을 만나면 행복하다. 너무 가늘지도 굵지도 않은 볼펜을 손가락 사이에 끼고 글씨를 쓸 때의 맛이란. 올곧은 반골 기질과 여울물 같은 융통성을 겸비한 선비를 만난 기분이다. 흰 종이 위를 종횡무진하며 내 생각과 느낌을 실어 나르는 반려 펜이 없다면 나는 고인 물처럼 썩을지도 모른다. 하여 나는 알랭 드 보통식으로 볼펜을 마시멜로하고 솜사탕한다.           


여시아문 칼럼(불교신문)


고훈실  동화작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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