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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이 가져다 준 것들

by 고훈실

한낮에 나가면 뿌연 아지랑이가 보인다. 아스팔트 위로 이글거리는 열기들이다.

앞으로는 이런 극한 기후가 뉴노멀이 된다는 기상학계의 전망이 나왔다.

인간의 체온을 넘어선 기후에 열사병으로 쓰러지는 사람과 동물들.

요즘 뉴스를 보면 이래저래 우울하고 답답하다.



하지만 보도블럭 틈새로 고개를 내미는 뽀리뱅이처럼 싱싱한 즐거움도 있어 이 폭염이 견딜만하다.


첫째는 잔기지떡을 발견한 기쁨이다.

평소 떡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어디서 받더라도 누구에게 다시 선물하곤 했다. 그런데 한여름 답사에서 아침 거리로 받은 떡 하나가 내 취향을 바꿔버렸다.


쌀과 막걸리로 13시간 이상 발효시킨 잔기지떡은 쉬이 상하지 않아 여름 떡으로 불린다.

쫀득 담백한 흰 떡 안에 부끄러운 듯 살짝 심겨진 팥소의 달달함은 반전 매력 그 자체다.

처음 맛본 떡에 내 눈이 번쩍 뜨였다.

전래동화 속 호랑이가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했던 떡이 바로 이 잔기지떡이 아니었을까!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으니 말이다.



내친김에 검색해 보니 잔기지떡과 사촌간인 기정떡이 있다. 기정떡은 발효 과정은 잔기지와 같지만 팥소 없이 담백한 백설기 스타일이다. 취향껏 즐길 수 있는 여름떡이 있어 행복하다.


둘째는 버력을 알아본 일이다.

너무 덥다 보니 바닷가에 자주 나갔다.


어느 해 질 녘. 방파제를 따라 바람을 맞으며 걸었다. 그런데 파도치는 소리가 걷는 구역에 따라 미묘하게 달랐다. 테트라포트 곁을 지날 때면 촤르르촤박 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돌로 메꿔진 곳은 철썩 퍽 철썩! 하는 센 소리가 들렸다.



호기심에 방파제를 자세히 관찰했다. 센소리가 나는 돌 구간은 파도와 직접 부딪히는 경계면이자 그 아래 무수히 깔린 돌들의 무덤이었다. 돌은 겨우 아귀를 맞춘 채 서로 얼기설기 쌓여있었다.


틈새로 갯강구가 드나들고 낚시꾼이 버린 미끼가 보이기도 했다. 마치 함부로 버려진 생이 세상에 절규하는 듯 파도 소리가 거칠고 억셌다.


그때 안희연 시인의 산문집 ‘단어의 집’에서 본 버력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광석을 캘 때 광물이 섞여 있지 않아 쉬이 버려지는 돌멩이가 버력이다. 버력은 방파제를 만들 때 기초를 다지기 위해 물속 바닥에 집어넣는 잡다한 돌이다.


그 버력이 여기 숱하게 쌓여 있었다. 발음하기도 힘든 단어가 파도와 부딪히며 제 몫을 다하고 있다.


저 수많은 버력들이 있어 방파제가 생기고 그 위로 등대가 불을 밝힌다. 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의 수고로움과 이바지를 시간의 주름 속에서 결코 잊지 않아야 겠다.


폭염 속에도 배롱꽃은 더욱 붉고 뭉개구름은 가을을 채비한다. 무엇이든 나쁘기만 한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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