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철부지다. 아연할 사람도 있겠지만 요즘 철부지는 철없어 보이는 어리석은 사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제철을 알지 못하는 시대에 사는 사람이란 뜻이다.
한겨울 딸기, 초봄 수박, 가을날의 샤인머스캣.
마트 과일 코너는 우리가 매일 접하는 철부지 현장이다. 예전엔 봄이 무르익어야 제맛이던 딸기가 11월부터 나오고, 수박은 이제 봄 소풍 간식 메뉴가 됐다.
이런 조기출하 과일을 보면 묘한 죄책감이 밀려온다. 아직 햇살이 덜 차오른 땅에서, 화석연료의 온기로 키워낸 열매를 우리가 너무 성급히 탐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제철 보다 앞당긴 농산물 때문에 농사는 ‘시기’가 아닌 ‘타이밍’이 되어버렸다.
사계절이란 말은 더 이상 자연의 시간표가 아니라 유통의 전략표 느낌마저 든다.
무엇이든 ‘빨리’ 나오고, ‘비싸게’ 팔리면 최고인 자본의 속도가, 자연의 속도를 앞지르고 있는 시대다.
우리 아이들에게 제철 과일을 어떻게 알려줘야 할지 난감하다. 책에는 분명 봄 과일인데 겨울부터 앞다투어 나타나는 현실은 마법도 환상도 아닌 우리 시대의 패착일 뿐이다.
과채뿐 아니라 꽃이 피는 순서도 철부지다.
매화를 시작으로 산수유 개나리 목련이 시차를 두고 피었지만, 지금은 거의 같은 시기에 피고 진다. 꽃 피는 시기로 시절을 가늠하던 낭만도 도롱뇽 꼬리처럼 사라졌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편지를 읽는다’던 가곡 가사를 공감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런 것들이 슬프다. 제철 실종은 이제 감상感傷이 아니라 엄연한 현실이라 두려움마저 든다.
제철을 모르는 사람에게 기다림이란 말은 또 얼마나 허망한가.
반려견에겐 “기다려!” 훈련을 시키면서 정작 인간인 우리는 기다림을 잊고 있다.
기다림이란 정서는 인간다움의 다른 말이라 생각한다. 참고 견디고 버텨야 만날 수 있는 기다림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다가가는 향기로운 소통의 도구다.
하여, 실종된 계절이 돌아오게 하려면,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할 것 같다.
제철이라는 기준이 무너지면서 농사 주기가 왜곡되고, 곤충과 작물의 균형이 깨지고 있다.
거기에 우리는 계절 감각을 상실하고 기다림의 미학을 놓치고 있다.
더 늦기 전에 제철에게 제 자리를 찾아주어야 하지 않을까.
꽃들이 피어나는 순서를, 미처 익지 못한 햇살을, 웅숭깊은 기다림의 맛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