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어른들이 마시던 시커먼 한약이 내게는 미스터리였다. 혀끝만 대어도 미간이 찌푸려지는 그 쓴맛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발 째 들이키다니. 학교에 가니 ‘입에 쓴 약이 몸에 좋다.’는 속담을 가르쳤다. 나는 어른들의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도리질했다. 그때의 나에겐 사탕과 달고나와 뽑기의 달콤함이 맛의 전부였다.
생물학적으로 쓴맛은 ‘위험’을 알리는 신호다. 자연계에서 쓴맛은 독성 물질의 징후이며, 동물은 본능적으로 이를 거부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러나 어른의 삶은 역설적이게도 거부해야 할 쓴맛을 수용하면서 시작된다. 아침을 깨우는 아메리카노의 쓴맛은 어젯밤의 피로를 억누르고 오늘을 버티게 하는 마중물이다. 퇴근길 소주 한 잔의 쓴맛은 입안을 맴도는 비굴함과 자괴감을 씻어내 주는 정화수 역할을 한다. 혀는 쓰다고 외치지만, 뇌는 그 맛 뒤에 숨겨진 안도감을 읽어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며칠 전 시장에서 고들빼기 김치를 샀다. 쓴맛을 우려내기 위해 소금물에 담궜다 헹구는 작업이 필요한 손 많이 가는 음식이다. 아버지가 특히 좋아하셔서 봄이 되면 엄마는 넉넉히 담그곤 했다.
대학 자취 때 엄마가 고들빼기 김치를 한 통 가져 오셨다. 잘 먹으라고 신신당부 하셨지만 나는 쓴 김치가 싫어 이리저리 굴리다 결국 상해서 버렸다. 그런데 먼 훗날 먹어본 고들빼기 김치 맛이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혀끝에 상큼하게 감기는 맛의 본질이 다른 맛이 아닌 바로 쓴맛이었다. 씁쓸하지만 여운이 남고 독선적인 것 같지만 다른 맛을 아우르는 품 넓은 맛!
어른이 되고서야 쓴맛의 묘미를 비로소 알았다. 머위나물과 씀바귀가 더 이상 낯설지 않고 배탈이 났을 땐 그 쓰다는 익모초를 조금 마시기도 했다.
쓴맛을 알게 된 후에야 비로소 다른 맛의 층위도 깊어졌다.
고통스러운 실패(쓴맛)를 겪어본 사람만이 소소한 일상의 평온함(단맛)을 진심으로 음미할 수 있다. 산해진미를 다 맛본 뒤에야 평범한 나물 채소의 쌉싸름한 풍미를 즐길 수 있게 되듯, 인생의 쓴맛을 통과한 어른의 영혼은 이전보다 훨씬 입체적인 감각을 갖게 된다.
어른에게 쓴맛은 피해야 할 독이 아니라, 삶의 비린내를 잡아주는 꼭 필요한 향신료가 된다.
어른의 미각은 미각(味覺) 그 자체보다 삶의 맥락(Context)으로 완성된다.
오늘도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저마다의 쓴맛을 견디며 살아간다.
누군가에게는 오늘 마신 커피가 유독 쓸지도 모르겠다. 어른의 맛은 쓰다. 그러나 그 끝맛은 은은한 단맛과 미량의 고소함이 묻어난다. 우리가 이 맛에 익숙해질수록, 우리의 인생이라는 요리는 더욱 풍성한 풍미를 내뿜게 될 것이다.
고진감래(苦盡甘來)는 여전히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