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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모토리 Jun 24. 2016

삶에는 정답이 없다! 왜냐고? <시리어스 맨>

<시리어스 맨 _ 2009, 코엔 형제>

               

<시리어스 맨 _ 2009, 코엔형제>


2010년에 리뷰를 한 번 쓴 이후 다시 한번 이 영화를 봤다. 내 소장영화 폴더에 이 영화가 있는 줄 알았는데 살펴보니 껍데기만 있고 삭제된 것이다. 요즘은 하드디스크도 얼마 하지 않는데... 쩝, 그래서 다시 이리저리 뒤져서 영화를 찾아내고 팝콘 대신 땅콩을 올려놓고 밤새 영화를 감상했다.



"영화 '시리어스 맨'은 방법론으로서의 희극과 주제로서의 비극이 서로 충돌하고 공존하면서 놀라운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는 작품이다. 수다스럽고 황당한 동시에 신랄하면서 섬뜩한 이 해프닝 코미디는 무척이나 코언스럽다."    -이동진 평론 중-


이동진의 평론은 정말 깔끔하고 정결하다. 시리어스 맨에 대한 평가도 역시 그렇다. 그러나 영화는 구조인만큼 그 구조를 쪼개어 들어가 보면 감독이 원하는 실마리가 나오겠지만 코엔 형제가 보여주고자 했던 그 의미를 묻기 전에 나는 이 영화에서 또 한 가지 의미. 프롤로그의 불길함. 그것이 영화 전체에 던져주는 어떤 메시지가 이 영화를 보는 개인마다 다 다를 것이라 생각했다. 그 생각이 미치자 이 영화가 정말 오싹한 블랙코미디 영화임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작가가 만들어놓은 작품 속에서 의도된 감독의 저의를 읽어내고 공감하며 감동할 수 있는 것은 일차적인 감상법이다. 스크린과 물리적 공간 그리고 필름이라는 소스의 삼각구도에 놓인 감상자들은 절대로 이러한 일차적인 감상 태도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영화적 화두는 그렇다 치고 이야기의 전개가 관객의 몫이 아닌 이유다. 그러므로 관객은 예상된 감정이입을 기대하며 자신의 돈을 지불하고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자신의 의견을 내려놓으며 그냥 즐기는 것이다. 시리어스 맨은 이러한 영화적 화두에 또 하나의 선물을 던져준다. 바로 '푼크툼(punctum)'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어떠한 예술작품의 구성에 있어서 스투디움과 푼크툼이라는 용어를 종종 접하게 되는데 스투디움은 상식적이고 관습적인인 해석 방법이며 푼크툼은 어떤 작품이 우리에게 남긴 일종의 상처이며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오로지 개인적으로 느끼는 주관적인 작품의 해석이자 감동인 것이다. 그러니까 뭔가 해석을 하기 이전에 이미 끌렸을 때를 일컫는 말로 뭔가를 다 본 다음 심각하게 고려해 도출하는 해석의 틀이 아니라 작품(영화)의 개별적 존재의 자극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이런 영화가 좋은 영화다. 극장에 들어앉은 수많은 사람들의 무리가 모두 다 이동진처럼 영화를 해석하고 보았다면 그게 미친 세상인 거다. 코엔 형제의 영화는 대부분 이 푼크툼을 철저히 지키고 있다. 의미심장한 프롤로그는 이미 관객들에게 심한 미스터리와 공포심, 그리고 불합리와 불확실성에 대한 강력한 푼크툼 선방을 날리고 시작하는 거다. 그래서 이 영화는 흥미롭고 재밌다.



1960년대 미국 중산층의 삶이란 열심히 일하는 가장과 안락한 가정을 지키는 것이 선이라고 봤을 때 이 영화에 등장하는 아주 침착하고 선량한 주인공 래리는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캐릭터들을 만나며 생각지도 못한 돌발상황에 놓이게 된다. 계산을 해야만 답을 구할 수 있는 공식을 진리로 믿고 있는 물리학 대학교수에게 예기치 않게 벌어지는 돌발상황들은 그의 정신상태를 어지럽게 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그(유대인의 삶으로서)가 생각하는 삶의 공식들에 대해 그 주변의 캐릭터들은 전혀 배려나 관심이 없다.



아내는 자신의 친구와 사랑에 빠져 이혼을 선언하고, 얹혀사는 동생은 경찰의 수사를 받는다. 딸은 성형수술을 위해 아버지 돈을 훔치고, 아들은 마리화나에 빠져 말썽을 피운다. 이웃 남자는 그의 집 마당을 침범해 건물을 짓고, 대학에선 종신 재직권 심사를 놓고 누군가 그를 겨냥해 투서를 보낸다. 벽에 부딪친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대인 래리는 유대교 지도자인 랍비들을 차례로 찾아간다. 왜? 아무도 답해주지 않는 자신만의 답답한 일상적 문제들을 해소하기 위해...



짜잔, 그런데 프롤로그에서 그는 이미 '상징'적으로서의 자신을 구해준 랍비를 집으로 초대한 바 있다. 그러나 그의 아내가 그는 몇 년 전 죽은 사람이라며, 그러므로 그는 악령이라며... 집을 방문한 랍비에 가슴에 송곳을 찔러 버린다. 그러자 랍비는 비리한 웃음으로 괜히 이 집에 왔다며 비틀거리고 집을 나간다. 그리고 노인이 나간 대문 밖으로 거센 눈발이 몰아친다.



주인공 래리는 영화 전편에 걸쳐 최고의 랍비인 마샤크를 결국 만나지 못한다. 그 아들이 대신 마샤크를 만나서 현명하게 살으라는 얘기를 듣게 된다. 이 장면은 엄청난 아이러니를 내포하고 있다. 이 역시 푼크툼의 일종이지만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의 복잡하지 않은 연관관계는 그렇게 영화 전 편에 걸쳐 이어진다.



프롤로그의 눈발과 마지막 래리 아들의 수업 중 몰아닥친 거대한 토네이도의 상징은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부적응적이며 구체적이지 못하고 난데없이 당하는 인과관계 속에 있는지를 고스란히 상징하고 있다. 그렇게 가장 강력한 메시지와 복선이 하나로 뭉쳐지면서 영화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그리고 거침없는 박수와 감동의 세리머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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