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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모토리 Jun 30. 2016

우리 모두는 경계에 있다 <코뿔소의 계절, 2014>

코뿔소의 계절 (Rhino Season, 2014)_바흐만 고바디

<코뿔소의 계절 (Rhino Season, 2014)_바흐만 고바디>


바흐만 고바디. 지난 2000년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이라는 영화로 본인을 오래간만에 통곡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그 뒤 [거북이도 난다]까지만 봤는데, 이번에 보게 된 영화가 바로 이 [코뿔소의 계절]이다. 먼저 이 영화, 머랄까. 참으로 심란하다.


소수민족에 대한 깊은 상념을 안겨준 바흐만 고바디의 전작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코뿔소의 계절>은 바흐만 고바디가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이란에서 터키로 망명한 뒤 만든 첫 영화인데 여기에도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거북이도 난다> 등 이란 내 쿠르드족의 현실을 그리며 우리를 속절없이 비탄과 울분에 젖게 했던 그 고바디가 엄연하게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그는 전작과 달리 이 영화에서 새로운 영상미학을 실험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 이유는 좀 심각한 지점에 있다. 주제가 현실적 공간이 아닌 사상적 경계이기 때문이다.


극중 사헬의 아내 역할로 열연한 모니카 벨루치. 그녀의 새로운 영상미학을 이 영화에서 감상할 수 있다.


'코뿔소의 계절'은 이란의 이슬람 혁명 당시 반혁명 죄로 투옥되었던 쿠르드족 시인 '사데그 카망가르'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오랜동안 자신의 아내를 짝사랑해온 운전수의 모함으로 30년 동안이나 구금되었던 시인 사헬. 사헬은 이후 30년 형을 선고받고 만기 후 출소했지만 그의 아내는 교도소로부터 남편이 죽었다는 통보를 받는다. 사헬은 살아있지만 죽은 자였던 것처럼 바흐만 고바디, 그리고 쿠르드족. 그들은 모두 살아있지만 ‘죽은 자’이며, 여기 있지만 추방당한 자들이다.



영화 속에 간간히 나오는 시 구절은 그렇게 죽은 자들을 위한 축문이다. 시가 카망가르의 것인가 했더니 의외로 그건 또 아니었다. 시의 주인공은 이란의 저명한 여류시인이라는 것. 감독은 그의 시를 쓰지 않고 왜 굳이 다른 이의 시를 내러티브로 활용했을까? 그 이유는 감독이 처한 현실의 참담함에 있지 않을까.


이란이라는 조국의 참담함 속에 억울하게 인생을 날려버린 시인의 참담함. 그런 영화를 망명까지 가서 만들어야 하는 감독의 참담함. 그리고 그런 주인공을 실제처럼 연기해야 하는 동병상련의 연기자(베르후즈 보소기)의 참담함까지 이 영화는 참담함이란 키워드의 3종 세트가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는 비련의 복합선물세트다.



그래서 그 이미지들을 표현하는 것 중의 하나인 영화의 시적 내레이션이 다른 작가의 시어야 하는 이유였을 것이다. 영화에서 실화로 등장하는 카망가르라는 시인은 반혁명 죄라는 누명을 쓰고 들어갔으므로 참담할 이유의 시가 별로 없다. 하지만 감독이 만들어 낸 복합적 이미지의 표현으로 등장하는 영상들은 시와는 별개로 기괴하기 이를 데 없다.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 하늘에서 쏟아지는 거북이, 차창 안으로 고개를 들이미는 말, 메마른 땅에 쓰러진 코뿔소 등 낯설고 비현실적인 이미지들이다.



어쩌면 그건 당연하게 느껴진다. 고바디 입장에서 정상적인 영상이 등장하는 영화는 아예 의미가 없을 수 있기 때문이다. 참담함과 그런 사람들의 처지가 모여 영상적 이미지가 되었는데 그것이 [자전거 도둑]에서 느껴지는 리얼리티를 기반으로 한 삶의 일상처럼 느껴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영화 제목이 왜 '코뿔소의 계절'인가 하는 질문에 감독은 "관객에게 맡긴다.." 고 답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참담한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끝날 때 감독의 의도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 그가 영화의 말미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으로 관객에게 문신처럼 강렬한 하나의 시구를 고맙게도 선사했기 때문이다.


16회 전주국제영화제에 참석해서 자신의 영화소개를 했던 바흐만 고바디 감독


"경계에 사는 자만이 새로운 땅을 만든다."

이제야 이해가 간다. 경계가 지닌 의미는 삶과 죽음, 정치와 망명, 거주지와 이탈, 낯 섬과 익숙함, 배신과 용서.. 이 모든 것들을 사이에서 다룬다. 그 아슬아슬한 경계의 사이에서 영화는 감독의 의도와 관객의 시선을 또 한번 마주 대하며 마지막 경계에 선다. 거기엔 경계에서 이탈한 낯선 죽은 코뿔소가 보인다.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경계는 본 영화의 주제이자, 키워드이며 자신이 분신처럼 생각하고 살았던 쿠르드족들에 대한 삶의 애환을 다룬 전작들에게 바치는 바흐만 고바디 스스로의 영상적 고백이다. 서러운 울부짖음이자 참담함을 알리는 서곡인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바흐만 고바디의 고통이 다시 한번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는 아마도 조만간 죽을 것만 같았다고나 할까. 아니 죽지 못해서 살고 있다고 표현하는 게 더 옳을 것 같다.  하지만 이미지는 이미지일 뿐이고 시는 시일뿐이듯이, 작가는 언제나 변절 가능한 대상이며 그래서 작품은 완성되는 그 순간 작가에게서 떠나고자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이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마지막 경계의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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