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모토리 Jul 22. 2016

행운(fluke)은 거저 오지 않아 <올 이즈 로스트>

All Is Lost, 2013_ J.C. 챈더

올 이즈 로스트 (All Is Lost, 2013)_ J.C. 챈더


로버트 레드포드가 주연으로 등장하지만 놀랍게도 혼자만 나오는 이 영화는 제18회 부산국제영화제 월드시네마 부문 상영작이자 제66회 칸영화제 비경쟁부문 초청작이다. 인도양에서 요트를 타고 항해를 하던 한 남자(로버트 레드포드)가 선적 컨테이너와 충돌하는 사고를 당한다. 내비게이션과 라디오까지 모두 고장 난 상태에서 그가 의지할 것은 오직 나침반과 항해 지도, 그리고 자신의 오랜 항해 경험뿐인데...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마지막에 노인은 얘기한다. 아무리 바다에서 혼자 얘기를 하고 잡은 물고기에게 얘기를 하고.. 상어에게 얘기를 하고 낚싯줄에 앉은 새에게 얘기를 해도 사람과 직접 대화하는 것이 이렇게 좋은 것인 줄은 몰랐다고..."


바다 한가운데서 자연으로서의 사람은 진정한 인간적 존재가 된다. 살아남기 위해서란 대 명제는 내가 속한 사회로 돌아가고 싶은 열망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생선 잡으러 동네 앞바다에 나간 상황이 아니라 엄청난 태풍이 몰아치는 인도양 한가운데서 조난되었다는 설정이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이런 재난 속에서 사람과의 대화를 그리워하는 생각 자체는 곧 사치다. 영화 그래비티에서 뚜렷한 인상을 남긴 미지의 조난영화가 이번에는 바다 한가운데서 펼쳐졌다. 톰 행크스가 주연을 맡았던 '캐스트 어웨이'가 홀로 생존하기 위한 사투를 그린 영화라면 로버트 레드포드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사실 혼자만 출현함- 생존의 이유보다는 인간의 내재적이며 필연적인 삶의 열망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영화 전편에 걸쳐 대사라고 해봐야 두어 마디 정도인 로버트 레드포드의 연기는 재난과 실사를 압도한다. 흡사 노인과 바다를 연상케 한다. 영화 스토리상 그가 왜 요트를 타고 인도양 한복판에 나왔는가는 전혀 얘기해주고 있지 않다. 그의 주변 일상에 관한 무엇하나 전해주는 것이 없는 이 영화가 너무나 강렬한 것은 망망대해에 오로지 인간으로서 홀로 남아있어야 하는 어떤 사회적 동물의 잔인한 고독을 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재난영화들이 공통적으로 그 주인공들이 왜 살아남아야 하는지를 복선으로 깔고 있다. 노인과 바다, 그래비티, 케스트 어웨이, 콘티키 등등... 하지만 이 영화엔 그러한 복선이 없다. 그냥 살아남기다. 그런데 가슴이 먹먹하다. 로버트 레드포드의 연기에 눈물이 났다. 그가 죽을 것 같이 스트레스를 받아..


" Fuck!" 


이라고 외칠 때 심지어 나도 같이 따라 했을 정도로 몰입했다. 나는 망망대해가 얼마나 공포스러운지 안다. 어촌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망망대해는 동력이 없으면 바로 죽음이다. 맑은 태양이 작렬하는 아름다운 지중해나 파타야 해변이 아니라 조난당한 바다는 곧 죽음의 전주곡이기 때문이다. 작은 파도에도 무동력선은 빙글빙글 돌다가 좌초한다. 순식간이다. 



영화 제목이 '모든 것을 다 잃다'이다. 그는 이 영화에서 무엇을 잃을까 봐 두려워한 것일까. 자신이 물리적으로 가진 것을 다 잃었다는 것이 두려웠을까? 아니면 인간이 마지막으로 악에 바치면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 자신 자체가 두려워지게 된 것일까? 혹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그때 비로소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 무서워졌던 것일까? 


천재지변인 재난은 행운의 반대말이다. 하지만 행운의 대척점은 재난이 아닌 행복이다. 인간은 행복을 원하는 존재이지만 행복은 그저 찾아오는 행운과 격이 다르다. 실천을 덕목으로 하며, 행복은 자기성취를 기반으로 한다. 성공한 사업가로 등장한 주인공은 그것을 홀로 누린다. 요트를 타고 인도양 한복판에 나올 수 있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자신이 투자한 행복의 기회를 실천으로 옮기는 사람이다. 



하지만 재난은 그러한 행운과 행복의 기준점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인간의 행복을 위한 기획이나 거저 얻어지는 행운 모두를 부정한다. 한 순간에 인간은 처절함에 놓이게 되고 행복으로 인한 이 사태에 간절하게 행운을 기다리는 신세가 된다.  그 처절함의 순간에 우리는 깨닫는다. 


나는 과연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  


주인공은 행복의 과정으로서 일어난 이 사태에 단순한 행운을 바라지 않는다. 그는 혼자 끊임없이 살려고 뭔가를 만들고 그리고 상상하고 상황에 대처한다. 그것은 단 한번 자신에게 찾아올 행운을 붙잡기 위한 가장 처절한 사투이자 현재 삶의 열망에 대한 간절함 그 자체다. 



그 간절함의 반대편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절실한 행운의 기회를 가지지 못한 채 행복하게 생을 마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다행히 관객으로서 그 과정을 지켜보며 안도한다. 하지만 자꾸 뭔가를 잃어버리는 인간의 습성상 모든 것을 다 잃는다는 설정은, 개인이 결국 그 상황이 되어서야 비로소 감당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감독은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지금 행복한가? 그렇다면 그 행복이란 때론 절실하게 행운을 찾아야만 하는 재난을 감수할 수 있는 수준인 것인가를 물어보는 듯하다.   



그의 행운은 어쩌다 구멍으로 쏙 들어간 플루크  (fluke)가 아니었다. 자신이 추구하는 행복을 이어가기 위한 처절한 투쟁으로 일궈낸 엄숙한 행운이다. 로버트 레드포트의 놀라운 연기가 나의 숨 턱을 졸랐다. 배우 한 명이 이렇게 긴 호흡을 이끌고 갈 수 있다는 것이, 게다가 대사도 거의 없이 무한한 먹먹함을 선사할 수 있다는 결론이 영화 내내 나를 전율하게 만들었다.


별 네 개 : 단 한 명의 배우로 완성한 재난 영화의 새로운 감동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 모두는 경계에 있다 <코뿔소의 계절, 2014>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