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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모토리 Aug 04. 2016

지난겨울, 한 토막의 대화

[단편] 윗골마을 두 노인네의 막걸리 주정부리를 듣다


"거기 추운데 방문 좀 닫아라.. 요즘 날이 왜 이리 춥냐?"


"그러게, 허구한 날 술만 처 마시지 말고, 일 좀 하지 그러쇼. 맨날 방구석에 틀어 앉아서 영감이 도선사 석가모니 돌부처라도 되우?"


"이 사람이 지금, 누군 일을 안 하고 싶어서 이러고 있는 줄 아는가? 내가 이래 봬도 폭탄 뒤집어쓰고 베트콩 잡던 귀신 특전사 출신이야... 이 사람아"


"아이고야, 저 입구녕엔 종기도 안 나나? 맨날 자랑할 거 없으면 총질한 게 무슨 정승질이라고..."



"그나저나 애덜은 어째 다들 바쁜가... 해 넘어갈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연락도 없구만"


"그래도 싸놓은 자식이라고 애덜은 보고 싶나 보네.. 못 올라온다고 전화 왔잖소.. 애들도 사는 게 중요하지, 늙은이들 고생살이를 뭐하러 부러 보러 온담요... 내가 일부러 오지 말라고 했으니 그리 아슈.. 사는 게 하루살이인데 어떻게 남들하고 똑같이 살라고 그러나..."


"그랴도 손주 놈 얼굴도 보구 그런 게 가족이지... 함께 모여 밥 처먹는 게 식구라고... 참 나"


"어디 가서 그런 말하지 마슈... 남사스러우니까... 지들이 우리가 키워서 이렇게 살만해진 건가? 공부하나 못 시켜주고 지들이 맨날 아르바이트하면서 자기 살길 찾은 애들한테 무슨 청승으로 그런 말이 나오누? 쯧쯧 그런 말 하려거든 차라리 나가서 쇠주나 한잔 하시구려... 징징거리지 말구"



"그랴? 그럼 나가서 소주나 한잔 할랑 게, 잔돈 좀 있으면 주지?"


"아니 저번에 준 돈은 또 어쩌구, 시방 또 손을 내민디야? 영감은 참 뻔뻔하게 낯짝도 좋수... 그랴... 내가 땅 파서 돈 버는 줄 아는구먼"


"아따, 오늘따라 꽤 척척 거리는 소리를 지르네.. 그럼 이 엄동설한에 손가락 쪽쪽 빨면서 어디 나가서 얻어 마시란 것이여? 최씨한테 얻어먹는 것도 한두 번이지... 낯짝 들고 다닐 여유도 없네..."


"그럼 처먹지를 말아.. 이 양반아, 나가려면 나가고 맘대로 혀, 이거밖에 없어..."



"어이!!! 최씨 집에 있나.... 날도 추운데 방구석에서 뭐하나... 탁주나 한 잔 하지?"


"어이구, 형님! 날이 이렇게 추운데 어인 행차슈? 이런 날엔 아궁이에 엉덩이 딱 대고 그냥 세월아 네월아 하는 게 장땡인데..."


"그러지 말게, 마누라 구박받다가 열복 터져 나왔는데... 탁주발이나 한잔 하세나?"


"그럽쇼... 나도 시방 낮거리 한방 절실하턴 차인데.. 잘 되었소"


 

"아따... 막걸리 한번 시원하다... 서울탁주는 역시 묵동 것이 제맛이여? 안 그랴?"


"뭔 소리요~형님... 서울탁주는 창동이 일등이제... 물이 틀리당께...."


"그려? 그나저나 속 편한 소리나 하고 앉아있구먼 우리가... 암튼 시원하게 재워둔 막걸리는 이렇게 시퍼렇게 추운 날 벌컥벌컥 마셔야 제맛이지...커어~~"


".............................."


"근데 왜 그랴, 낯빛이 별로 안 좋구먼... 뭔 일 있어?"


"아무것두 아녀요, 날이 갑자기 추워지니까 이런저런 생각이 드네요"


"이번 명절에 애들은 온다고 하던가? 우리 집은 이번에 마누라가 애들한테 올라올 생각도 하지 말라고 해서 설은 그냥 조용하게 지내야 쓰겠네... 니미, 이젠 아주 지가 가장이야"


"아이고, 형님두... 형수님도 다 저간에 사정이 있으니 그리 했겠지.. 뭔 성질을 내슈...."



"그러게, 그건 그렇지만도... 사람 마음이 정한다고 그리 되던가... 손주 놈 얼굴이 가물가물거린다네..."


"우리 집은 작은 애한테 연락이 왔는데, 일이 잘 안 풀리나 봐요.. 목소리가 다 죽어가는데, 이건 뭐 명절이라고 다른 사람들은 이리저리 다 즐거운 표정인데.. 왜 우리 집구석만 잘 풀리지 않는지... 미치겠구먼요"


"큰 놈은?"


"미리 다녀갔어요, 개네도 장사가 안돼서 쉽지 않아 보이는데, 그래도 속이 깊은 놈이라 지 부모한테는 이런저런 딱한 소리는 안 해요. 그나마 다행이지요... 요즘 애들은 부모가 돈 안 주면 와서 행패도 부린다는데..."


"그려, 아무리 없이 산다고 해도 이런 지경은 아니었는데... 왜 이렇게 됐는지... 통 모르겄네..."


"형님... 이게 다 정치하는 놈들이 제대로 하지 못해서 그런 것 아닌겨?"



"에이... 그런 얘기는 또 뭣하러 해? 언제 정치꾼들이 우리 같은 서민들 생각해 준 적이 있던가? 저번 겨울에도 연탄 나르는 행사 때 슬쩍 얼굴 비추고는 또 도로아무타불이잖나? 이젠 그 자식들 기대도 않혀"


"그러게요... 저번엔 무슨 당대표라는 놈이 와서 흑인 애한테 연탄하고 똑같이 생겼다고 해서 말도 많았잖아요"


"그래, 그럴 때나 우리 동네가 TV에 한방 나오고 말지... 언제 또 나오겄는가?"


"그나저나, 형님은 전달 일한 돈 받으셨음까?"


"아? 그거, 그 공사장 바지 놈이 인부들 임금 줄 돈을 들고 튀었다나 어쨌다나? 아니 그 돈이 되면 얼마나 된다고... 나참.. 돈을 안주길래 찾아가 봤는데 거기도 난리북새통이여... 조만간 해결될 기미가 안 보여...


"에이... 씨팔.... 죽으라고 하는구먼요"



"그러게, 이래저래 돈 때문에 이 동네 민심도 이상해지고 있어... 괜히 일 소개시켜 준 사람들한테 빈말이 가고 있구먼... 자네는 그냥 입 닫고 있어... 그래 봐야 좋을 거 뭐 있겄나?"


"휴~ 알겠음다... 그나저나 윗동네 교식이네 얘기는 들었쥬?  교식이 동생이 놀음하다가 집안을 다 말아먹었는데, 글쎄 이번에 또 한 건이 터져서 교식이네 집까지 날아가게 생겼다는데요?"


"나도 들었어... 화투보다 무서운 게 경마여... 그 자슥이 이번엔 경마에 손을 댄 것 같아. 그게 나도 좀 해봐서 아는데, 내가 돈을 건 말이 결승선에 들어올 때 막 피치를 올리면 그게.... 어어어..... 내 심장까지 벌렁벌렁 한다니까... 기냥 막 미쳐 돌아가는 겨"


"그래도 저의 집 말아먹고 이젠 가족들까지 다 말아먹어야 정신을 차리려나... 참.. 그나저나 형님도 그려~ 그 잘 나가던 택시를 거기가 꼴아처넣구도 그런 소리가 또 나와요? 어이구..."  


"이 사람아... 내가 지금 돈이 없어서 이러지... 돈만 쥐어줘 봐... 허허허, 낸들 속이 좋아서 그런 소리 하겠냐? 그 때 얘기하면 내속이 먼저 뒤집어져, 내가 오죽하면 경포대 가서 관광마차 끄는 말을 보고 그 녀석 주둥이를 냅다 주먹으로 팼다가 경찰서까지 끌려갔을까... 시발"



"그나저나 본동 슈퍼 할머니가 그러는데, 그 앞집에 복권방에 우리 동네서 처음으로 로또 1등이 나왔다는데?"


"나두 들었어. 근데 마누라가 어디서 그런 소리를 들었는지 느닷없이 나한테 당신은 아니지 그러더라고, 그래서 내가 아니라고 했더니.. 이 할망구가 욕을 막 해대는 거야, 그럴 줄 알았다느니 자신이 뭔 복이 있어서 서방 덕을 보겠냐면서... 아니 내가 뭐를 잘못했다고.. 젠장"


"아이고야, 형님, 언제는 로또 산다고 형수님한테 잔푼 뜯어서 탁주 마신 일은 생각도 안 하시고... 허허"


"근데 그게 요즘은 한 놈이 타가는 경우가 거의 없다면서?"


"그렇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것도 다 짜고 하는 거 아니냐며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이 나라에 도무지 믿을만한 구석이 하나도 없으니 어찌하면 좋겠소?"

 


"그러니까 말이여. 내가 우리 마누라한테 그렇게 거짓말 밥먹듯이 하는 놈들 찍지 말라고 했는데... 기어이 동네 사람들 다 표몰이해서 아주 생지랄을 하더니만 시방 나라 꼬락서니 돌아가는 것 좀 보게... 그래서 맨날 집에서 그것땜시 한바탕 한다니께..."


"에구, 형수님이 무슨 잘못이 있어요... 텔레비전에서 나불대는 새끼들이 다 원수들이지.. 게네들은 그때만 넘기면 다 우리를 짐승, 개 돼지 취급하잖아요... 알면서 뭘 또 그랴"


"그려... 나도 알지.. 말하면 뭣하랴."


"그런데 혹시 내일 밤에 개부리봉에 같이 안 가실래요? 잘하면 돈 되는 게 하나 있어서"


"그랴? 밤중에 웬 산에... 무슨 일인데... 돈만 되면야 나는 좋지"


"누가 산 언덕에 있는 사유지에 마늘밭을 하나 갈아엎어야 한다는데..... 동생 놈이 포클레인 하나 가지고 있어서 같이 가서 좀 도와달라네요"


"한 겨울밤에 왠 미친놈이 마늘밭을 갈아엎어? 알았네... 돈 되면 뭘 못하겠는가..."



"근데 자네 둘째 놈은 돈이 얼마나 필요하다고 찾아온 겐가?"


"무슨 돈요?"

 

“이 사람이 나를 속이려고. 둘째가 돈 좀 달라고 그랬지..? 그 자슥들, 애비 사는 거 보구도 돈 달래는 소리가 나오나. 참 나..."


“에휴. 그냥 한 잔 하세요. 말하면 속만 쓰린걸 뭐."


“이 사람아. 돈이 다가 아녀. 사람 사는 게 말이지. 돈이 다가 아니라니까. 주위에 사람들 인심 다 잃고 그렇게 사업한다고 떵떵거리던 사람들 좀 봐. 자네 눈에는 그게 좋아 보여? 어때? 자넨 그런 사람들이 좋아 보이나. 난 다 도둑놈으로 보인다네."



“에이, 형님도 다 사람 나름이지요. 그나저나 요즘은 다리도 성하지 않아서 좀 힘이 드는데. 안 그래도 내일 산에 오르려면 오늘은 많이 마시면 안돼요."


“에헤라.. 이 사람아, 저승 가면 술도 없다네. 이 사람아. 그거 아나? 귀신 되면 이 좋은 술도 계집질도 다 못한다니까. 이제 냄새나는 나이가 되서리.. 아니지. 떡하니 잡총처럼 일어나던 물건도 썩어 문드러지고 해서 계집질은 내 못해도 술은 죽을 때까지 마신다. 우리가 뮌 낙이라고 있는나? 썩은 나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친구 삼아 낮술 하는 게 행복인지 알게나. 허허 "


“그럼요. 나한테 형님만한 술 친구가 있나요. 그래도 조금씩 드세요. 손주 놈 장가가는 거는 거뜬히 봐야죠."


“그래야지. 그 자식 결혼할 땐 뭐라도 내가 좀 도와줘야 하는데..."



“형님은 그래도 손주 복은 있잖아요. 안 그래요?"


“그래, 그 자식이 요즘 똑똑해서 영재반에 다닌 데나. 그런데, 이 할아비를 닮아서 그렇지. 뭐 "


“그런 말 마셔요, 나중에 형님처럼 주정뱅이 될까 봐 걱정됩니다."


“이 사람이.... 하하. 그랬거나 저랬거나 어때. 게네들 세상은 우리랑 완전히 다를 거야. 아마 직장 회식에서도 술 취해서 주정하면 짤리는 시대가 올지도 모르지. 사는 게 뮌지도 모르고 돈만 버는 벌레 같은 녀석들 틈에서 저렇게 죽도록 남의 돈 벌어주는데 정력을 다하는 게 때론 불쌍하기도 해, 이 할아비처럼 낮술이나 시원하게 할 수 있을까.. 허허."


“형님, 오늘따라 취하는 속도가 쬐끔 빠르네요"


“난 참 막걸리가 좋아. 왜 그러냐면 돈이 없어도 술 취하고 배부르잖아. 근데 요즘은 친구 녀석들 만나면 막걸리는 잘 안 좋아하더라고..."


“우리 동네에서나 그렇지요. 뭐 "



“그래 오늘은 돈이 없어서 그런가 금방 취하네 그려.. 그나저나 둘째 놈에게 애기해. 키워주고 먹여주었으면 됐지. 그래 지가 나이가 몇 살인데 지금 나타나서 아버지한테 손을 벌리냐고 말이야. 아니 그 얘기를 왜 못해? 내가 대신해주랴?"


“됐어유. 마음은 그래도 능력이 안되는데 답답하죠. 그 자식들이 뭐 노름을 해서 그렇게 된 겁니까. 탁상공론하는 공무원 놈들이 무슨 상가임대차 보호한다고 지랄을 떨어가지고 보증금이 두배로 뛰었데요.. 얼마간 그 돈을 구하지 못하면 당장에 길거리로 내 쫓기게 생겼나 봐요."


“그럼. 권리금은?"


“권리금이 다 뭡니까. 가족이 금방 쪽박 차게 생겼는데..."


“에휴. 도와주는 놈들이 없어, 정부도 다 가진 놈들 편이구. 주택정책 하는 놈들. 다 아파트 가지구 있는 놈들이라구. 그냥 술이나 한 잔 더하게. 나머진 내가 달아놓을게.."


“ 미안해요. 형님. 술맛 떨어지는 얘기만 해서"


“아냐, 무슨 소리야. 자네 맘 다 알아. 내가 아는 친구들한테 한번 돈 좀 알아봐 주께. 죽으란 법 있겠어. 근데 그 자식 놈들 그런 얘기 하고 나면 지 애비가 이렇게 술 먹으며 고민하고 있는 거는 알고나 있을까. 난 그게 더 무서워. 그래서 아예 그따위 소리들은 접수를 하지 않거든. 그게 내가 사는 방식이야. 그게 편하다구. "


“형님도 늘 말만 그렇지 뭘... 하여튼 신경 써 주셔서 고마워요."


“이 사람이... 자식새끼들이 다 뭔가. 이웃 술친구가 진정한 저승 동지라네. 이 사람아"



" 너무 늦었네요. 형님. 술도 많이 하신 거 같은데.."


“ 그래. 오늘은 술이 팍팍 받는구먼. 나이가 드는 게 이런 것 같아. 전엔 옆에 늙은호박이래두 엉덩이 슬슬 만져가며 마시는 술이 제일 맛있었는데, 이젠 자네처럼 자식걱정하는 늙은이랑 마시는 술이 더 재미가 좋아.. 이거 장난 아니네"


“하하, 그놈의 변덕은 여전하십니다요"


“날이 많이 차졌어. 재수 씨도 몸이 안 좋다고 하던데.. 잘 좀 돌봐줘야지."


“늘 그렇죠.... 뭐.... 남은 건 제가 계산하고 갈게요....."


“아냐. 내 이름 앞으로 달아놔. 내가 내일 보란 듯이 계산할 테니까. 자넨 그런 걱정하지 말게. 이 사람아. 나도 무척 마누라 속 썩이고 애들 교육 잘 시키지 못하면서 이렇게 변두리로 살아왔지만 돈을 밝히거나 미친놈처럼 돈이 필요해 하면서 살지는 않았어. 애들한테 얘기해. 먹고 살만치만 가지고 살아도 인생은 행복하다고. 그렇게 애기해 주라고... 주정뱅이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요즘 애들은 너무 싸가지가 없어. 돈이면 뭐든지 다 된다고 생각하거든. 막걸리에 낮술... 이게 돈으로 될 것 같나. 하하하 "


“형님,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그래. 이 나이에 조심해봐야 그게 그거지 뭐. 나 그만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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