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레몬트리] & [바시르와 왈츠]
이 두 영화를 말하기 전에 이스라엘이란 나라에 관해 잠시 생각해 봤다. 이스라엘은 원래 기원전 수천 년 동안 유대민족에 의하여 왕국의 건설과 통일 및 분열이 계속되었으나 BC 1세기경 로마의 속주로 편입된 후 멸망해 유대인들은 세계 각지로 흩어져 오랫동안 살게 되었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 후 팔레스타인에 아랍·유대의 개별 국가를 각각 건설한다는 UN의 결정에 따라 1948년 지중해 동남쪽 연안과 아라비아 반도 서북쪽 일대에 이스라엘이 건국되었다.
무려 2천 년 전에 잃어버린 땅을 자신들의 땅이라고 우기며 자금력을 동원해 나라를 건국한 이스라엘. 당근 2천 년간 그곳에서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황당무계한 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들은 대게가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인들, 기독교를 믿는 아랍인들, 시오니즘과는 상관없는 유대인들이 서로 어울려 자신들의 문화를 이루며 대대로 살고 있었다. 종교는 그들에게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던 셈이다.
유대민족의 수천 년간 이어온 자신들에 대한 영토 회복에 대한 집념은 실로 위대하기까지 하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세워지는 과정은 종교적․인종적 우월성을 주장하는 정치권력에 의한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이주와 토착 종족의 추방과 살해, 이어지는 대규모 전쟁과 대량 학살의 과정이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세계사 속에 묻어두어야 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 시대는 자본과 권력이 지배하는 세상이니만큼 힘이 역사를 지배한다고 보는 측면에서 볼 때 자본과 권력이라는 도구를 이용해 이스라엘이 자국의 땅을 회복하고자 시도하는 것을 싸잡아 비난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 비교적 자신의 견해를 확실하게 밝히고 있는 안영민 교수의 얘기를 인용해 본다..
"백인 중심의 미국 건국사가 당시 수천 년 동안 그곳에 살고 있던 인디언의 학살사인 것처럼 역사는 누구의 시선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 그리고 다른 것에서 나아가 그에 대한 판단과 비판을 해야 한다. 몇 백 년이 지난 후에 인디언에 대한 학살과 흑인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잘못이었음을 후대가 인정했지만 현시대에 그러한 행위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지금도 지구 상 곳곳에서는 유사한 차별과 억압, 살해가 벌어지고 있다. 특히 이스라엘은 세계 7위에 이르는 군사비 지출과 미국의 막강한 경제적․군사적 지원을 바탕으로 50년이 넘는 동안 죄 없는 다른 공동체를 철저히 파괴하고 잔인하게 추방, 학살하였으며 그것에서 나아가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로서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지는 일인 양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다. 유대인의 근면성과 민족적 우월성을 강조하고 언론과 활자매체, 영상매체를 통해 강력하게 홍보하고 선전하고 있다. 인종주의에 바탕한 이러한 오만과 인류에 대한 무례는 자국의 구성원에게조차 학살의 주체가 되게 하여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고 사회 내부의 공포 분위기 조성과 억압으로 나타나 인간성과 민주주의를 질식시킨다."
이렇듯 이스라엘의 건국 사는 세계의 평화를 붕괴시키고 중동의 새로운 화약고 역할을 자처했다. 이건 국가 간의 문제이기 전에 종교 간의 장벽이기도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이곳은 전 세계의 첨예한 대립의 온상이 되고 있다. 오늘 말하고자 하는 두 영화는 이러한 정치상황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참고로 말하자면 이 두 영화는 모두 이스라엘 사람이 만든 영화라는 것이다.
레몬 트리 (Etz Limon)
감독 : 에란 리클리스 / 출연 : 히암 압바스, 알리 슐리만, 도론 타보리, 로나 리파즈 미셸
개봉 : 2008 이스라엘, 독일, 프랑스, 106분
주인공 살마는 팔레스타인 땅에서 대를 이어 내려온 레몬 농장을 지키는 여인이다. 10년 전 남편을 잃고 자식을 모두 외지로 보낸 뒤 오랫동안 농장일에만 전념하며 살아가는 전형적인 팔레스타인 여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농장 바로 옆으로 이스라엘 국방장관이 이사를 오게 된다. 이스라엘 국방장관의 경호팀은 팔레스타인 여인이 운영하는 농장을 통해 팔레스타인 테러단체가 잠입해 올 가능성을 들어 농장에 있는 레몬나무를 모두 베려고 시도한다. 살마는 자기 삶의 뿌리를 지키기 위해 법정투쟁을 불사하는데..
영화의 이야기는 이러한 레몬 농장에 대한 법정공방으로 이어진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한 외로운 팔레스타인 여성이 거대한 이스라엘 정부를 상대로 자신의 농장을 지키려는 필사의 노력을 담아내어 만족할 만하지는 않지만 소기의 성과를 거두는 엔딩 장면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 결론적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대립을 극소화시키고 영화의 감성적인 면을 부각시켜 현실로서의 한계점을 인식시키고 그곳에서 공존하는 두 대립 간의 갈등을 나지막하게 이야기하는 듯 보이나 이 영화는 상당히 불편한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
이 영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건국 상황, 즉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복기를 상당히 긍정적으로 세뇌하고 있다. 감독은 참 교묘해 보인다. 극의 처음 씬... 레몬 농장이 보인다. 원래 존재하지 않던 경계선으로서의 이미지를 이스라엘 국방장관과 셀마 사이의 이웃집 경계로 부지불식간 상징화시킨다. 그리고 왜곡된 세뇌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1. 1904년부터 러시아에서의 학살을 피해 이루어진 이주 => 국방장관이 셀마의 이웃으로 이주해옴
2. 1905년 유대민족기금(Jewish National Fund)이 아랍인들로부터 땅을 사들이기 시작했고 => 셀마의 농장을 배상할 테니 이사할 것을 종용
3. 유대인 자본가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각종 인허가의 90%를 독점 => 셀마가 저항하자 농장을 폐쇄하여 나무가 죽어감
4. 1935년에는 1,212개 공장 가운데 872개를 장악. 아랍인들은 무장투쟁과 총파업으로 맞서 => 이스라엘 법원에 항소
5.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팔레스타인이 군사기지화되자 유대인 소유 기업의 군수물자 생산이 증가하면서 경제적 성장과 군사력 증강이 이루어진다. => 이스라엘 장벽의 완성이 국방장관의 집 근처에서 끝남
6. 영국 정부는 1947년 2월 14일, 팔레스타인 문제를 유엔에 넘긴다. => 대법원에서 최종 판결 통보
영화는 이렇게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복기를 큰 뼈대로 상징화시키면서 가녀린 한 팔레스타인 여인의 항쟁을 미끼 삼아 교묘하게 이야기를 끌고 간다. 결론은 국방장관과 셀마 모두 피해를 입는 공동의 선으로 결말짓는다. 여기서 감독은 인종 간의 갈등을 겪는 자국의 상황을 한 여인의 이스라엘 도전기로 엮어 감동을 이끌어내려고 하지만 그 결론이 사뭇 의심스럽다.
국방장관은 아내가 이 사건으로 떠남으로써 혼자가 되고 마당 앞에는 커다란 게토 장벽이 들어서 풍경이 막히는 결과를 접하지만 셀마는 자신의 농장 3분 1의 레몬트리를 잘리게 된다. 그것조차 성공이라는 뜻이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는 논리로 엔딩을 끌고 간다. 영화의 전개 방식에서 보듯이 여인의 도전은 사실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러한 센티멘탈한 드라마 하나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해묵은 논쟁을 비유하기란 버거워 보인다. 버거운 게 아니라 사실은 상당히 왜곡되어 있다. 감독은 이스라엘 민족이... 그들이 이미 그 지역에 대한 점령권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당연시하는 태도를 줄곧 취하고 있다. 원초적인 분규의 본질을 이해하지 않고 말초적인 사건의 실례 하나로 이 거대한 담론을 비유하기엔 턱도 없이 모자란 공허만이 영화 내내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시선은 여전히 불편하다. 그가 억지로 팔레스타인 여성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는 것이 너무 느껴지기 때문이다. 감상주의적 태도에 정치적인 견해를 작위적으로 넣어놓은 것은 사실 비극적인 실망감으로 다가오기까지 한다.
바시르와 왈츠를 (Waltz With Bashir)> 2008 / 감독 아리 폴만
애니메이션 '바시르와 왈츠'는 2008년 칸 영화제가 주목하고 골든 글로브 외국어 영화상, 전미 비평가 협회 작품상,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에 노미네이트 되는 등 그 해 영화 팬들에게 가장 큰 주목을 받았던 작품이다.
1982년 레바논의 친 이스라엘 지도자 '바시르'가 암살당하자 레바논 민병대와 이스라엘군은 복수를 원한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습격해 밤새도록 난민들을 학살한다. 남녀노소 구분하지 않고 이날 하루 희생된 사람들이 최소 3,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희생자는 부녀자와 어린아이가 대부분이었다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상황이다. 감독은 실제 당시 전투에 참가한 복무 경험이 있다. 이스라엘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의무복무제도가 있는 나라다.
영화의 전체적인 줄거리는... 어느 날, 옛 친구와 함께 술집에 들른 영화감독 아리는 계속 반복되는 친구의 악몽에 관해 듣게 된다. 매일 밤 꿈에 어김없이 등장해 자신을 쫓는 정체 모를 26마리의 사나운 개들에 관한 이야기다. 두 남자는 이 악몽이 80년대 초 레바논 전쟁 당시 그들이 수행했던 이스라엘 군에서의 임무와 어떠한 연관이 있다고 결론 내린다.
오랜 시간 친구와 대화를 나누던 중 아리는 자신이 당시의 일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잃어버린 기억을 찾기 위해서 전 세계를 돌며 자신의 옛 친구들과 동료들을 찾아 나선다. 아리가 과거의 비밀을 더 깊이 파헤쳐 갈수록 때로는 선명하게, 때로는 초현실적인 이미지의 형태로 그의 기억들도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하는데...
한 영화평론가에 의하면 이 영화는 잊혀진 기억을 찾아가는 영화인의 내면을 표현하기에 애니메이션과 다큐멘터리의 조합은 더할 수 없이 적절한 장치이며 칸 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하여 가장 먼저 화제가 되었고 의심의 여지없이 전쟁과 인간의 관계를 고발한 고전으로 남을 작품이라고 평했다. (권용민)
그러나 내가 볼 때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기제는 집단 무의식증에 기반한 변명이다. 이스라엘 국민들이 2차 대전 후 팔레스타인에 자리를 잡고 국가 선언을 했을 때, 무엇보다 그들은 기뻤겠지만 남의 안방을 군홧발로 치고 들어온 더러운 기분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 당시의 기억들이 이제 2세대에 걸쳐 조금씩 희석되고 있지만 아직도 후유증은 여러 곳에서 보인다. 그 더러운 기분을 감추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모른 척 하기다.
주인공 아리는 극 중에서 아버지가 했던 말을 상기한다. "너희들 전쟁은 휴가라도 있었지.. 우리는 밤새도록 열차를 타고 와서 플랫폼에서 아내와 포옹을 한번 하고 다시 전쟁터로 떠났지.. 그게 전쟁이야.." 그는 아버지의 이름을 빌어 당시 이스라엘 건국의 초기에 얼마나 많은 자국민들의 희생이 있었으며 그 토대 아래 지금의 이스라엘이 탄생했는지를 넌지시 얘기한다. 그리고 레바논에서 있었던 친 이스라엘 민병대가 저지른 끔찍한 살육을 기억하지 못하겠다며 전 세계를 돌면서 당시의 전우를 만나러 다닌다. 악몽에서 헤매면서...
자학과 반성은 그 궤가 분명히 다르다. 자신의 일탈적인 행위들에 대한 기괴한 공포와 자학이 곧 반성일 수는 없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감독 역시 집단학살을 묵인한 이스라엘 정부와 레바논 민병대에 대한 심각한 문제제기는 당연하게 다루면서도 당시에 작전에 참여한 장병들에 대한 기억에는 어불설성 기억을 지워버리는 면죄부를 던져주고 있다. 자기도 물론 괴롭겠지.. 오죽하면 그 불편한 이야기를 스스로 꺼냈겠는가 말이다.
여기에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아리 풀만 감독의 경우 사실의 고발에 있어서 민족보다는 영화감독으로서의 명분이 더 중요한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택한 게 애니메이션 장르이고... 그 장르의 표현을 몽환적으로 처리함으로써 전쟁터에서 느낄 수 있는 종합적인 관음증을 배제할 수 있었다. 적어도 전쟁영웅은 거기에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다가 후반부에 느닷없이 난민촌 실사 영상이 등장한다. 이 전략은 다소 유효해 보인다.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정확하게 전달되는 시점이자 적절한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속 불편한 점은 집단 무의식에 도취해 있는 그들 사고방식의 문제다. 까발리려면 확실하게 까발리든지.. 확실하게 반성하던지... 어정쩡한 스탠스를 취한 채 말도 안 되는 웅얼거림으로 발가벗겨진 역사를 대하기에는 뭔가 큰 무리수가 보인다. 큰소리를 내서 얘기하기가 창피하면 차라리 무성영화를 만들던지...
이스라엘의 역사만큼... 이 두 편의 영화는 평단의 우호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난 우울함을 금할 수 없다. 그들의 원죄는 2천 년 전 자기 땅에서 추방될 때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홀로코스트 뒤에 숨어서 더 끔찍한 만행을 저지르진 않았는지 솔직하게 말할 때가 오길 기다려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