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 웨이’와 ‘투스카니의 태양’이 선물한 이태리 와이너리 여행
그야말로 영화 속에서 발견한 우연한 기회였다.
“와인은 인생과 너무 닮았어요. 난 포도가 자라는 과정을 보는 게 좋아요. 그 여름 햇살이 비춘 각도도, 날씨가 어땠는지 생각하는 것도 좋고…. 한 병의 와인은 인생 그 자체죠. 포도가 자라고, 숙성하고, 그리고 복합적 요소를 갖게 되고…. 그러면서 그 맛도 정말 끝내주죠.”
영화 ‘사이드 웨이(Sideways, 2004)’의 소심한 주인공 마일스에게 마야가 던진 한마디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 것인가? 와인이 인생이라잖아!! 평소 '몬테스 알파'라는 국내 와인의 기형적 표준화에 질려있던 나는 단순하게도 이 한 편의 영화를 통해 와이너리 기행이라는 독특한 여행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 여행기간 동안 햄버거 가게에서 신의 선택이라 불리는 61년 산 보르도 ‘슈발블랑’을 1회용 컵에 따라 마시는 '폴 지아메티'의 엽기적 블랙코미디 정도까지는 보여주지 못한다 손 치더라도 와인이 인생이라는 올바른 등식 하나는 확인할 수 있는 그런 여행을 꿈꾸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게 구체적으로 어디로, 언제, 어떤 이들과 함께 그 여행을 가야 하는지는 전혀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그 기회를 잡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뜻밖의 일은 항상 생긴다. 그로 인해 다른 길을 가고 내가 달라진다. 생각지도 못한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다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에도. 그래서 더욱 놀랍다”
영화 ‘투스카니의 태양 (Under The Tuscan Sun, 2003)’에서 주인공 프란시스의 마지막 독백이다. 이 영화는 사실 이태리 중에서도 토스카나 지방의 매력을 바가지로 내 머릿속에 마구 퍼다 붓는 그런 혹독한 지름신의 영화였다. 게다가 주인공 프란시스는 ‘스트리트 파이어’의 영원한 로망, 다이안 레인이다.
사실 이 영화는 톡 까놓고 이태리의 모든 아름다움에 관해 말하고 있다. 인간의 표정, 눈빛, 숨소리, 조용히 반짝이는 지중해... 영화 내내 프란시스를 따라가다 보면 아말피 해변의 자유분방함과 강렬한 태양 그리고 낙천적이며 열정적인 그들만의 삶의 문화를 풍족하게 느낄 수 있다. 심지어 촉촉한 포도 알의 진한 향기와 오래된 골목에서 들려오는 낡은 종소리 그리고 말은 없지만 충분히 다정스러운 친구들까지 덤으로 만나볼 수 있다.
이렇게 단 두 편의 영화로 그동안 참고 있던 방랑벽이 와르르 무너져 버린 나는 급기야 와인과 이태리라는 공통분모를 발견하고는 그동안 여기저기서 빈대 붙어 마시던 와인 중 이태리 와인의 리스트를 꺼내 노트에 적기 시작했다. 몇 번이고 다녀온 곳이기도 하지만 난 또 거기를 가야만 했다. 그렇게 벼르던 어느 날 평소 알고 지내던 선배가 이태리 와이너리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일정표에 있던 내 스케줄을 박박 지우고 나서 부랴부랴 전화를 걸었다. “선배~저도 데리고 갈 거죠?” 그리고 얼마 후 우린 이태리로 날아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소믈리에가 아니어서 더욱 즐거운 와이너리 여행
‘와인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 누구나 다 소믈리에가 될 필요는 없다’. 함께 여행한 선배의 지론이다. 동감 100%다. 누구는 프랑스 와인이 최고라 하고 누구는 칠레 와인이 질이 균등하다고 하고 누구는 이태리 와인을 으뜸으로 친다. 심지어 한때 잘 나가던 일본산 만화책에서는 부르고뉴 와인으로 아예 불을 질러대고 있다. 이렇게 호불호가 너무나 선명한 와인시장에서 내가 좋아하는 와인을 불쑥 내미는 것 자체가 실례가 될 정도로 조심스러운 일이 되어버렸으니 맘 놓고 와인 평을 하는 것 자체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우린 이태리로 날아갔다. 그냥 ‘사이드 웨이’에서 처럼 단짝 친구랑 여행하며 “피노누아가 좋냐? 카베르네 소비뇽이 좋냐?” 하면서 낄낄대며 정말로 한적하게 와인을 즐기고 싶었던 까닭이기도 했다.
이러한 나의 기대는 첫 방문지 바르바레스코의 대표적 와이너리 부르노로카(bruno rocca)에서 이루어졌다. 토양에 모래 비율이 적어 이태리 특유의 강건한 와인의 대표주자로 불리는 바르바레스코 지역은 연간 20만 병으로 와인의 퀄리티를 조절하는 세계적인 와이너리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그중 부르노 로카(bruno rocca)에서 생산하는 2003 라바야(Rabaja)는 바를로의 ‘로베르토 보에르치오’와 견줄만한 와인으로 세계에서 몰려든 와인 애호가들의 기대감을 충족시키고도 남을 불후의 역작이라 평할 만했다.
더구나 농장주인 아주머니가 직접 만들어 요리해주는 꼬마 라비올리와 두툼한 햄 요리는 와인농장을 찾는 이들에게 여행의 즐거움을 한껏 배가시켜 주었다. 식탁의 메뉴를 완성시키는 장치가 바로 한 잔의 와인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저녁식사였다.
이태리 와인의 숨겨진 지존, 테누타 산 레오나르도
도착 첫날의 피곤함을 잊게 해 준 '부르노 로카'에서의 멋진 저녁을 뒤로하고 우리는 ‘라고 디 가르다‘라는 트렌토 초입의 큰 호수 마을에서 잠을 청한 후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빙하가 녹아 이룬 거대 호수인 ‘라고 디 가르다’. 최대 깊이가 360미터에 달해 호수라기보다는 바다라고 해야 할 이 드넓은 호수는 마침 온화한 날씨를 보여 산책하기에 딱 알맞았다.
이 지역에서 포도 재배가 활발한 것도 호수가 일종의 습도와 온도 조절 역할을 해 포도 생육에 알맞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는 일어나자마자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유명한 베로나의 주요 와이너리를 거쳐 서둘러 알토 아디제 트렌티노 지역으로 발길을 옮겼다. 알토 아디제 트렌티노는 이탈리아 여러 주 중에서도 가장 북쪽에 위치해 있는데 세련된 고급 와인이 많이 나오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탈리아 와인 하면 보통 사람들은 피에몬테와 토스카나 와인을 먼저 떠올린다. 하긴 실제로 이 지역의 생산량이 가장 많기는 하다. 그러나 반도 동북부, 오스트리아 접경의 특이한 산골 지역인 알토 아디제 트렌티노에서 고급 와인이 많이 나온다고 하면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오스트리아로 이어지는 산맥의 협곡에 자리한 와이너리인 테누타 산 레오나르도(Tenuta San Leonardo)에 들러보면 그 사실을 바로 인정하게 된다.
이 와이너리는 전 세계 와이너리 중 10위안에 드는 곳으로 97년 빈티지는 가히 세계 최고로 평가받고 있다. 창업주 Guerri Gonzaga 씨가 22살의 나이에 이태리 북부 사시까이아에서 쌓은 경험으로 이 지역에 와이너리를 오픈했다. 특히 농장주와 일하는 사람들이 3대째 함께 이어져 내려오는 특이한 역사적 배경도 지니고 있다.
산 레오나르도에는 이 지역 와이너리들이 컨소시엄으로 만든 까사델비노라는 식당이 있는데.. 이 운치 있고 멋진 식당에서 프로슈또와 스트루델이 가미된 멋진 안주와 산 레오나르도 와인을 놓고 와이너리의 소유주인 Guerri Gonzaga 씨의 외 할머니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듣는 경험은 와인의 맛에 녹은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했다.
이 와이너리의 대표적 와인은 멀롯, 빌라그레스띠, 산 레오나르도 이렇게 3가지인데 대표적인 와인인 산 레오나르도(San Leonardo)는 전형적인 보르도 브랜딩의 와인으로 ‘구요(Guyot)’라고 부르는 현대적인 포도 나뭇가지 배열법에 의해 이탈리아 와인답지 않은 독특한 스타일의 맛을 찾았다. 카베르네 소비뇽이 60%, 30%의 카베르네 프랑과 약간의 메를로가 섞여 있다. 24개월간 프랑스산 배럴에서 숙성하여 마치 비단 같은 질감과 폭발하는 듯한 향을 갖추고 있다. 특히 와인에 잡맛이 없어 더욱 귀족적인 와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주소 San Leonardo-38060 Borghetto A/Adige-Avio (TN) ITALY, Tel(39) 0464 689004
info@sanleonardo.it / www.sanleonardo.it
가는 길 밀라노에서 기차를 타면 베로나에서 한 번 갈아타야 한다. 총 2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트렌토에서 렌터카나 택시를 이용해야 하며, 30분이 소요된다. 추천 맛집 : Casa del Vino, 주소: Isera(TN) San Vincenzo 1, 전화: 0464 486057
자, 그럼... 화이트 와인의 맛은 어떨까?
몇 개의 와이너리를 돌았을까? 며칠째 레드와인만 마시다 보니 갑자기 화이트 와인이 댕기기 시작했다. 렌터카의 핸들을 잡은 자칭 카레이서 선배 덕분에 연일 시속 200Km의 속도로 이태리 북부를 질주하던 우리들도 흥분의 도가니였던 레드를 지우고 화이트로 평정심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생각을 가질 즈음 우리 앞에 나타난 와이너리가 바로 리비오 펠루가다. 한마디로 이태리 화이트 와인의 본 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리비오 펠루가는 베니스가 있는 베네토 주의 동쪽 편에 프리울리 베네치아 줄리아(Friuli Venezia-Giulia)라는 긴 이름을 가진 작은 주에 위치해 있다. 콜리오, 콜리 오리엔탈리 등 완만한 언덕에서 재배되는 포도밭은 완벽한 토양조건과 함께 세계 최고의 화이트 와인을 생산해낸다.
현재 이 와이너리를 운영하는 안드레아 펠루가 씨가 권해준 피노 그리지오(pinot Grigio)를 한 잔 입술에 얹었다. 이내 부드럽고 풍부한 향이 입속에 그득해진다. 왜 사람들이 이 와이너리를 이태리 모던 와인의 아버지라고 칭송하는지 알 것 같다.
끝없는 자존심이 만들어낸 천상의 맛, 폰테르톨리 & 포지오 안티고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1400년부터 와인을 재배하기 시작했다는 이태리 역사상 가장 오래된 와이너리로 손꼽히는 폰테르톨리와 부르넬로 디 몬탈치노로 유명한 포지오 안티고였다. 폰테르톨리 와이너리 주인장인 프란체스코 마쩨이(Mazzei)씨는 토스카나 지역의 톱 와인 메이커답게 본인이 끼안띠 클라시코 생산자 협회의 회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농담 삼아 ‘본때’를 보여준다던 폰테르톨리의 와인은 잡스러움이 없고 적절한 바디감과 풍부한 향이 매력적인 와인으로 아직까지 내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다.
포지오 안티고에서 만난 <부르넬로 디 몬탈치노>는 토스카나 지역에서 생산되는 오리지널 산지오베제 포도 품종으로 만들어진다. 자존심이 세고 까다롭기가 끝이 없어서 오크에서 2년 반 숙성시키고 병입 1년을 더 숙성한 후 출시하는데 가격대가 우리 돈으로 10만 원 대 이하가 없을 정도로 고급스러운 와인들을 내놓고 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지금까지 돌아본 와이너리 중 우열을 느낄 정도로 현저한 격차의 와이너리는 별로 없었다. 가족의 힘을 보여준 부르노 로카, 살아있는 전통 산 레오나르도, 완벽한 조건의 리비오 펠루가, 정열적인 폰테르톨리, 자존심의 결정체 포지오 안티코, 화학성분 제로의 마렌고까지 한마디로 이태리 와인의 매력이란 이런 것이다 라는 것을 화끈하게 보여주는 진정한 와이너리들 이었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와인은?
폭풍처럼 9박 10일이 지나갔다. 사이드 웨이의 마일스가 햄버거 가게에서 사랑에 상심한 채 부어 마셨던 61년 산 슈발블랑이 머릿속에서 지나간다. 산 레오나르도의 빈 포도밭에서 8천 년 전부터 길러졌다던 포도라는 과일을 다시 한번 상상해 보기도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동태에 새끼줄 꿰이듯이 줄줄이 이어져 쏟아진다. 이런저런 평가와 와인의 취향들이 거침없이 터져 나온다. 즐거운 밤이다.
마지막 밤, 5세기에 지어졌다던 낡았지만 운치 있는 마렌고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선배들과 넘쳐나는 와인들을 퍼다 붓다가 흥에 지쳐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짙은 안개가 걷히면서 내 눈 앞에 펼쳐진 화려한 녹색으로 무장한 토스카나의 아침을 발견하고 나서야 난 이 여행의 의미를 제대로 깨달을 수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와인? 맛있는 와인? 그것을 만나는 것은 의외로 간단했다. 그게 어느 나라의 어느 산지, 어느 와이너리의 작품이든 간에 그 와인으로 인해 심각해지지 않고, 철들지 않고, 즐거운 사람들과 언제든지 마실 수 있다면 그게 세상에서 가장 좋은 와인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아차린 것이다.
그 짧은 정답을 알기 위해 이 햇빛 반짝이는 토스카나로 날 보내준 폴 지아메티와 다이안 레인에게 진정으로 감사의 말을 전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