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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모토리 Feb 25. 2016

녹천의 이유(李濡) 있는 역사

누구도 몰랐던 전통의 달동네


동부간선도로가 마주 보이는 서울 북부의 도봉구와 노원구의 자락을 잇는 조그만 둑방길엔 녹천 길이라 불리는 오래된 길이 하나 있다. 고물상들과 폐자재 창고들이 즐비한 이 조그만 둑방길은 그렇지만 안쪽으로는 자그마한 마을 하나를 새 알처럼 품고 있는데 거기가 바로 녹천마을이라고 하는 동네다.



여기의 녹천(鹿川)이란 지명은 사실 오래된 지명은 아니지만 이 녹천이라는 조그맣고 아담한 마을이 창동과 평창동 그리고 조선의 어떤 의리의리 한 가문과의 지독히도 오래된 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별로 없다. 자, 그렇다면 개발로 인해 곧 사라질 운명에 처한 녹천이란 역사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여행을 떠나 보자....




오래된 사연이 흘러 들어간 골목


녹천은 오랫동안 재개발 제한구역으로 묶여 있던 마을이다. 1호선 노선이 마을 안쪽으로 지나가는 탓에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마을이 있는지 조차 모르는 조그만 동네였다.  근대화 독재 시절 서울 도심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이 집단으로 서식지를 이루고 살 때 의정부 장암과 중계본동 그리고 이 녹천으로 사람들은 흘러 들어왔다. 게다가 주변 인근이 개발이 금지된 지역이라 아직도 이곳 주택들은 많이 개량되지 못하고 낡은 채 그대로 남아 있는 집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지금은 재개발 승인이 떨어져 아파트 개발이 한창 진행 중이다. 이미 많은 집들과 골목이 헐리고 사라졌다. 조만간 낡은 집들이 촘촘하게 쌓여있던 이 달동네는 지명조차 생소한 아파트 촌으로 다시 세워질 전망이다.  아쉽게도 그 오래된 마을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도 안타깝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렇기에 동네는 사라져도 역사적 사실만큼은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이 글을 써 본다.  



녹천은 약수터가 아니라 누군가였다


녹천이란 이름은 그렇다면 언제 어디서 유래된 것일까? 이 녹천마을엔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사용했던 약수가 있다. 이 약수터 이름이 녹천이라는 얘긴데.. 사람들은 이 약수터 때문에 이곳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하지만 녹천은 약수터의 지명이기 전에 조선시대 북벌 정책의 대가였던 숙종 당시의 한성판윤이자 영의정 출신인 이유(李濡:1645~1721)라는 한 인물에서부터 기인한다.  그의 호가 녹천이었던 까닭이다.   



마을 입구엔 녹천에 유래에 대한 짧은 안내판이 보이지 않는 곳에 작게 놓여있다. 거기엔 이렇게 적혀있다. 조선 숙종 때 중랑천이 넘치는 대 홍수가 일어나서 마을이 괴사 되었는데 다음 해 이곳에서 용이 승천하고 난 후 대대로 풍년이 들어 백성들이 대를 이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전설일 뿐이다.  많은 사료들에 나오는 이 동네가 왜 녹천이 되었고 또 곡창이 되었는가는 그 시대상이 반듯하게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혜정공 녹천 이유는 숙종 당시 현재 서울시장이나 마찬가지인 한성판윤을 거쳐 영의정까지 지낸 것으로 유명한 왕손 집안 출신이었다. 특히나 이 집안은 한성판윤(오늘날의 서울시장)을 무려 20여 명에 걸쳐 지낼 정도로 강력한 세를 쌓아놓은 집안이었다. 



이 광평대군의 10대 후손인 녹천 이유는 한성판윤 시절 북한산성을 건의한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한성을 지키는 것은 종묘사직을 지키는 나라의 큰일이기도 하였지만 왕손의 일가인 자신에게는 조상의 얼을 지켜 내는 중대한 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난 연관성이 한 가지 등장한다. 그것은 바로 북한산성 축조이다. 당시 이유가 강력하게 숙종에게 건의해 청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쌓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북한산성을 당시의 많은 대신들은 반대하고 나섰다. 굳이 서울 북쪽에 산성을 쌓아 청나라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당시엔 이미 왜를 견제하기 위해 남한산성을 쌓은 이후였지만 이 남한산성으로는 북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인해전술의 어르신들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또 다른 반대 이유는 북한산 위에 짓는 것이라 공사비와 노동력을 합해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녹천 이유는 이러한 반대에 좌절하지 않는다.  일단 기존의 성곽 일부를 다시 보수한다는 답변을 청나라용으로 준비한 이유는 영의정이라는 벼슬이 되었을 때 비로소 북한산성 축조에 전 재산까지 털어가며 공사를 감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공사의 총 책임자인 이유는 이 공사를 위해 서울 외곽에 특별한 장소를 하나 물색하게 된다. 제일 먼저 한 것은 창동에 북한산성에 필요한 자재를 쌓아놓는 창고를 짓는 일이었다. 그 인연으로 인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곳의 지명은 비로소 창동이 되었던 것이다. 창동이 만들어지자 이유는 본격적으로 북한산성 축조에 힘이 될만한 전진기지를 근처에 세우게 된다. 



녹천, 조선의 북벌 계획을 도모하다

창동의 아래쪽으로 난 조그만 골짜기에 임시로 거처를 만든 녹천 이유는 이곳에 집안의 노비들과 아낙들을 배치해 북한산성 축조에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하고 인부들에게 밥을 지어 나르는 등 전면적으로 공사 지원을 하게 된다. 본인 스스로도 공사 중에는 이 곳에 기거해 살았는데 이로 인해 많은 친척들이 들어와 왕래가 빈번하였고 수많은 인부들이 이곳을 거쳐 공사현장으로 갔기 때문에 당연히 아무것도 아닌 이 골짜기는 급작스럽게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마을이 되고 말았다. 그 당시 사람들은 이곳을 녹천 골이라 부르고 그 마을 위에 조그만 산등성이에 약수를 만들어 약수터 이름을 녹천이라 쓰고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현재 1호선의 낯선 지명으로 남아있는 이 녹천은 그래서 사실 효종 이후 조선의 북벌 정책의 효시라고도 할 수 있는 특징적인 지명인 것이다. 45일 만에 나라의 수도를 떼 놈들에게 내주고 국치를 맛본 당시 왕족의 후손들은 종묘사직과 조상의 얼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재산까지 털어가며 북한산 위에 그토록 반대하던 산성을 축조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늘 그렇듯.... 옛터는 사라진다


그 반골 정신이 계승되어 내려오는 곳이 바로 녹천이다.  지금 녹천은 바뀌고 있다. 고물상과 폐 자재상들이 가득한  그곳은 이제 재개발이 진행되고 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서울 강북의 아주 깨끗하고 산세 좋은 아파트 촌이나 빌라촌으로 변해갈 것이다. 공장 같은 건물들이 하나 둘 씩 들어서고 예전의 조상들의 정기가 서려있는 그러한 마을들은 포크레인의 함성과 함께 전설 속으로 사라져 갈 것이다. 



그곳의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조차 자신의 침대 밑에 있는 이 땅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진 역사인지 알길 없이 자라나는 그런 안타까움이 없기를 한참 동안 기대해 본다. 이제는 헐어져 없어질 촌락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야트막한 민둥산에 걸쳐진 오래된 녹천의 약수터를 보면서.....



당시 나라를 지켜보겠다며 자신의 집안 전체를 이곳으로 옮겨와 공사를 지원하고 독려했던 한 늙은 영의정의 모습을 보면서 그가 생각한 나라의 정통성에 대한 자긍심을 얕은 마음으로나마 짐작해 볼 따름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 시대 우리는 녹천 이유(李濡:1645~1721) 같은 인물을 지니고 있는가? 그것이 생뚱맞게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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