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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모토리 Feb 09. 2016

졸며 울며 머리 깎던 시절의 풍경

5월.... 산골짜기의 작은 초등학교의 봄은 나른하기 그지없었다....


아이들이 사라진 텅 빈 교정을 몇몇 친구 녀석들과 오징어 놀이로 달래고 있던 나는 학교 운동장까지 올라와서 나를 찾는 엄마를 보고는 반가운 마음에 한걸음에 달려 나갔다. 오징어 놀이에 푹 빠진 친구 녀석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5월의 어느 날 그렇게 난 엄마를 따라 시내로 나섰다.


혹시 오늘은 엄마가 짜장면을 사주는 날인가 하는 기대감에 부푼 콩닥거리는 마음을 안고 작은 어촌의 신작로에 들어섰을 때 엄마의 시선이 어느 꾀죄죄한  이발소에 머무는 것을 직감한 나는 그만 앙~ 하고 그만 울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이유인즉슨 난 머리 깎으러 가는 게 그땐 제일 싫었기 때문이었다.



조그맣고 긴 낡은 이발소 표시등이 어지럽게 빙빙 돌아가고...


중앙 이발소라는 낡은 간판이 쓰러질 듯 걸려있는  그곳은 정말 내가 가기 싫어하던 곳 중에 하나였다. 그래서 한 달에 한번 머리 깎는 날이면 엄마가 손수 내 손을 잡아가며 도망치지 못하게 매달고 오는 것을 오늘도 난 그만 깜빡하는 정신에 한눈을 팔았던 것이다.  어릴 적 그렇게 가기 싫어했던 조그만 동네 이발소엔 20년 간을 가위 하나로 살아오신 분이 계셨는데...


홀홀 단신에 자식도 부인도 없이 그렇게 홀로 생계를 꾸려가는 한 아저씨가 작은 어촌의 아저씨들과 어린아이들의 머리를 그렇게 긴 세월 만져오고 있었다. 그런데 난 그때만 해도 이발사 아저씨가 동네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냥 보기에도 괜히 무섭고  퉁명스러운 데다가 머리를 깎을 때면  인정사정없이 나를 몰아쳐 눈물을 찔끔한 것이 한두 번이 아녔기 때문이다.



특히 머리를 깎으며 좁은 창가로 들어오는 봄의 오후 빛을 받고 있노라면 새록새록 나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곤 했는데 그럴 때면 아저씨는 내 목덜미를 콕~ 하고 매섭게 꼬집어 날 아연 질색하게 만들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고 그런 조그만 이발소 풍경은 이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나만의 추억이 되었다.


나를 의자에 얹혀놓고 잡지를 뒤척이던 어머니, 그리고 그 거울 사이로 힐끔힐끔 내가 눈치를 보면 정색한 표정으로 나를 놀리곤 하면서 머리를 깎아주던 이발소 아저씨. 지금은 다 이 세상에 안 계시고 없지만 난 그때 봄빛에 반사된 오후, 그 조그만 이발소 안의 봄기운을 아직 쉽게 잊을 수 없다.



나에겐 언제나 공포였던 머리감기..


특히나 내가 이발소에 가기 싫어했던 이유를 기억해 보니 바로 머리를 감을  때였던 것 같다. 지금이야 벌렁 드러누워 편하게 머리를 감아주는 것이 보편화되었지만 그때는 어린 나이에 그저 머리 팍 숙이고 잠깐이지만 숨도 쉬지 못하고 그렇게 있는 것이 너무 무섭고 공포스럽고 그랬다. 물론 너무 답답해서 잠시 눈을 떴다가 비눗물이 눈에 들어가면 동네가 떠나갈 듯 해프닝을 벌이곤 했는데 얼마나 심했는지 그러고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나면 두 분 다 흠씻 땀을 흘리며  난감해하던 표정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아저씨는 발이 불편해서 이발소외엔 많이 다니시지 않는 편이었다. 그래서 동네 거리에서 이발소 아저씨를 만나기란 쉽지 않은 편이었고 많은 아이들이 모두 그 조그만 이발소 안에서만 아저씨를 만나곤 했다. 하루는 아이들과 이발소 근처에서 놀고 있는데 아저씨가 이발소 앞에 나와 우리가 노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계셨다. 아이들은 인사를 하고 쭐래쭐래 도망치려고 했고 아저씨는 아이들을 이발소 안으로 불러서는 과자를 사주면서 신기한 묘기를 보여주셨다.



그 묘기는 다른 게 아니라... 

풍선에다가 비누거품을 묻히고 당신이 가장 아끼시던 면도칼로 그 거품을 깎아내는고 난이도의 면도 기술이었다. 동네 애들은 으레 '그거 누가 못해요' 라며 야유를 보냈는데, 실제로 해보니 그만 풍선들이 면도칼을 갖다 대자마자 펑펑 터지는 것이 아닌가. 아이들은 그저 놀랍다는 표정으로 멍해졌고 면도칼을 들고 웃으며 풍선을 닦아내는 아저씨는 그제야 자신의 실력을 인정해준 아이들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뻥튀기를 한 아름 선물해 주셨다.



몇 해가 지나고 난 집이 도시로 이주를 하는 바람에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그때가 초등학교 5학년 봄이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그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게 된 나는 물론 엄마가 없이 혼자 이발소를 찾았고 아저씨와도 많이 친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이사를 가게 되었다...


아저씨는 이북에서 내려와 변변한 기술이 없이 혼자 정착을 하게 된 이야기와 이발기술을 가르쳐 준 보육원 선생님. 그리고 이 마을을 떠나지 않게 된 동네 사람들의 끈끈한 정에 대해 머리를 깎으며 내내 자상하게 이야기를 해주셨다. 도회지에 나가서도 고향을 잊지 말라고, 그리고 이젠 혼자서도 머리를 척척 잘 감는 나를 보곤 많이 컸다고 쓰다듬어 주시기도 했다.



조그맣고 꾀죄죄한 산골짜기 조그만 이발소. 거기엔 언제나 작은 타일들이 민들민들해질 만큼 찰랑찰랑 멱 감는 물이 고여있고 들어오는 문엔 면도날을 가는 낡은 조각천이 장식된 중앙 이발소. 청계천에서 중고로 가져다 놓은 이발의자들도 이제는 낡아 뒤로 잘 넘어가지 않는다고 투덜거리시지만 그래도 본전은 다 뽑았다며 껄껄 웃으시던 그 모습이 그리워진다.


어느덧 서울로 올라온 지도 오래되었다...


골목을 다니다가 참 오래되었을 법한 이발소를 하나 찾아내었다. 한참을 망설이다 이발소에 들어가 머리를 깎았다. 만리동에 있는 성우 이발관도 내 예감처럼 그렇게 오랫동안 어떤 이들에게 추억을  가져다주었을 그런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빨간색 조그만 비누거품 통.... 면도날을 10년은 더 갈았을 찢어진 가죽 줄.... 이제는 잘 움직이지 않는 낡은 미제 이발용 의자까지... 



봄이 오는 어느 날, 창가로 비추어진 작은 오후의 햇살들이.... 작은 이발소 안에서 그렇게 내 추억을 간지럽히듯 자극하고 지나간다.  지금은 이 세상에 나와 같이 살고 있지는 않지만 동네 꼬마에게 겁을 주듯 웃으며 머리를 감겨주던 그 거칠고 투박한 손이 마치 오후 햇살에 살포시 잡히는  듯하다. 머리카락이 길어져 잘라지는 만큼의 추억을 난 그렇게 기억해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하얀 가운과 낡은 이발 가위 그리고 동네 아이들의 소음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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