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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모토리 Jan 09. 2017

속초_시린 추억의 주절거림

영랑동 양우아파트
살면서 참 귀찮은 것들이 있다 


이름이 뭐냐는 것까지는 서로 묻는 게 예의 같고 좋은데 거기서 조금만 더 들어가면 사실 별 감흥도 없고 재미도 없는 것이 바로 호구조사다. 난 태어난 고향이 속초가 아닌 고성군 거진이다. 거기는 완전 깡촌이라 남들에게 설명하기가 너무 힘들 때가 많아 가끔은 그냥 속초가 고향이라고 대중 얼버무린다.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초등학교 4학년 때 이곳으로 이사를 와서 대학교 갈 때까지 살았으니 실상 고향이라고 해도 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속초는 고향이라는 신득한 어감을 나에게 전해줄 만큼 그저 단란한 이미지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가족사로 보자면 전 재산 다 털어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터전을 내린 곳이 속초이며, 할머니가 한 겨울 영랑호 칼바람에 미군 모포를 빨며 자식을 키워낸 곳도 여기 속초였다. 어머니를 여의고 지랄 같던 도시 강릉을 떠나 본가가 이사한 곳도 역시 이곳 속초였다. 속초는 내가 태어난 곳 이상의 의미가 있는 동네였으며, 지금도 저기 트럭 뒤로 보이는 양우아파트에 나의 아버지가 살고 계신다.


영랑초등학교 정문


내가 본 속초의 첫 느낌은 이곳이 전형적인 깡패 도시라는 것이었다. 길거리에 지천인 깡패들과 건달들은 많아도 이 정도면 전국 최고 수준 정도는 되겠다 싶을 정도로 북적거렸다. 조폭은 당시 평범한 꼬마들에겐 간지작살의 트렌드였고, 공부하기 싫은 아이들에겐 우상이었다. 당연히 평일 학교 운동장에서는 퇴학당한 친구가 학교를 다니는 젓갈 같은 친구 대갈빠리를 박살내기 위해 삽자루를 들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풍경이 일상적이었다. 나 역시 하교길 오락실 골목에서 단념하듯 무지하게 센타를 당하곤 했다. 이런 일상이 보편화되다 보니 친구들 중 깡패가 여럿 있었다. 더러는 건달 짓 못할 만큼 착한 놈들도 있었는데, 방학기간 특수교육을 거치더니 순식간에 인성이 바뀌어 버렸다. 사실 놀랐다. 성악설, 성선설.. 이런 거 다 개구라라는 것을 몸소 입증해 보여 주시던 당대의 형님들 중 내가 아는 여럿이 험하게 맞아 죽었고, 살아있는 녀석들도 대부분 병신들이 많다. 꿈을 키우는 어린이라는 명제를 달고 ‘공교육 의무화 과정'을 성실하게 거친 죄밖에 없던 이들은 그 최후가 참으로 비참했으며 아직도 그 결과물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속초가 과거에 그렇게 척박했던 이유는 지리학적인 연유에 기인한다. 속초는 한국전쟁 이후 수복된 땅이다. 본래가 38선 이북에 있었던 북쪽 동네다. 그런 연유로 잠시 이곳으로 피난 온 많은 이북의 실향민들이 휴전 이후 다시는 고향땅을 밟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처음엔 되돌아갈 심산이 마냥 컸으므로 실상 제대로 삶을 뿌리내리지 못한 것은 이후 그들의 삶을 더욱 고달프게 하는 직접적 이유가 되었다. 그저 지나가는 잠시의 피난처가 어찌어찌하다가 삶의 주 무대가 되어버린 탓에 실향민 1세들과 2세들은 그 괴리감이 생각보다 더 심각했다.


그리고 피난과 상관없이 과거 이 곳을 찾은 이들은 인근의 토박이들이 아니었다. 속초는 과거 황량한 땅이었다. 이방인들에게 바가지 씌우는 횟집들로 유명한 대포동만이 초등학교 역사가 100년 가까이 되고 나머지 초등학교들은 대부분 반세기가 고작이다. 그만큼 도시의 문화와 역사가 일천한, 말 그대로 '풀들이 묶여 나뒹구는 황무지' 그곳이 속초였다. 어르신들이 술 안주삼아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돈 벌은 놈들이 돈 쓰러 오는 곳... 돈 없는 놈들이 돈 벌러 오는 곳. 그게 과거 속초의 전형적인 정체성이었다. 그들에게는 바다의 끝에 속초가 있었다.



사실 아이들은 그 지역 정체성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아이들은 그냥 풀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저 골목이 있으면 거기서 뛰어놀고 친구가 있으면 자연스럽게 사귀면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내가 만난 친구들은 다들 가난하고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다. 대문이라는 개념이 별로 없던 거진에 있을 때보다는 덜 했지만 그래도 여기 아이들의 가정형편이 더 낫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집에서 놀기보다는 늘 골목길이나 동네 공터, 심지어 공장부지에 까지 쳐들어가며 놀이를 벌이곤 했다.


바다가 보이는 수복탑이 있던 조그만 공원에서 야구시합을 즐기던 우리들은 어머니가 아들 손을 잡고 북녘의 땅을 바라보고 있던 그 동상의 의미를 전혀 몰랐으며, 심지어 그 동상은 우리들의 작은 구장에 존재하는 상징탑 정도로만 여겨졌다. 그렇게 속초의 길바닥은 흥미진진한 꺼리들로 가득했다. 건어물 덕장과 잡상인들의 난전 그리고 조그만 만화방에 요란스러운 롤라 스케이트 장까지. 온갖 번잡스러움은 전국에서 모두 가져온 것처럼 도시 속은 그렇에 아이들의 천국이었다. 오락실에는 갤럭시 이전의 수동 자동차 게임과 킹콩을 맞추는 레이저 건샷까지 속초는 갓 건져낸 어물전보다 싱싱한 놀이터였다. 그렇게 바다 경기가 좋았던 시절이 있었고 대부분은 가난했지만 그래도 대박을 건졌다는 어선의 선주아들 녀석들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가난했지만 사람들이 불평하지 않았던 유일한 시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5학년 때였던가... 


언젠가 반 친구 녀석 중 한 명이 학교에 뭔가를 조심스럽게 싸 가지고 온 적이 있었다. 조그만 라면봉지에 싸여 있던 것은 다름 아닌 갓 태어나 눈도 뜨지 못한 어린 생쥐 세 마리였다. 여자 아이들이 기겁을 하고 비명을 질러대는 바람에 담임선생님한테 들통이 난 녀석은 곧바로 이실직고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반에 여러 명 중 그렇게 집안의 장롱 속에 쥐들이 서식하고 있었다. 지금이야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그때는 실제로 그게 놀랍지도 않은 일상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먹을 것이 너무 없어 쥐들조차 없는 친구 집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대문과 담벼락은 고사하고 지나가는 길에 드르륵하고 여닫이 문을 열면 곧바로 방이 등장하는 그런 집들이 태반이었다. 나는 전학을 온 1년간 대부분의 놀이를 그런 집에서 경험했다. 부모님은 도외지로 간지 오래고, 남아 계시는 할아버지는 폐지를 주우러 하루 종일 집을 비워 그야말로 우리마저 없으면 사람사는 집이 아닌 그런 집들이 천지였다. 보리밥이 상해서 시큼털털한 냄새가 진동하는 부엌에서 몇날몇일을 바삭하게 말린 양미리를 구워 먹으려 꾀꼬리 놀이를 하곤 했던 친구들. 하지만 지금은 그들을 만날 수 없다. 다들 도시로 나가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찾은 명절날, 쉽게 갈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따라 골목길을 헤매고 지나가 본다. 예전엔 없었던 담들이 길게 늘어져 있고 거리도 조금은 넓고 시원하게 바뀌어져 있었다. 하지만 골목 어디에도 웅성거리는 소음조차 없고 심지어 동네 강아지 짖는 소리조차 사라진 묵음의 도시로 바뀌어져 있었다. 추억은 있으나 실체는 없고, 기억은 있으나 존재감이 사라져 버린 싸늘한 도시의 뒷골목.... 


속초의 겨울은 예전부터 나에게 엄청 시리게 다가왔다. 물론 어부들이야 명태가 날 때만 해도 겨울은 분명히 견딜만한 것이었겠지만 그 마저도 사라진 겨울 항구는 이제 오징어와 멸치, 그리고 양식업으로 근근이 바다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풍어로 대박이 나던 시절은 이미 다 지나가 버린 축제가 된 것이다. 거리 곳곳에 널려져 있어야 할 생선들이 보이지 않는 것은 10년 간 처음 보는 아스라한 풍경이었다.


언제나 방학이 되면


대학시절 친구들이 서울에서 내려와 연락을 해오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내가 감내해야 했던 숙제가 하나가 있었는데 그건 참으로 힘든 경험이었다. 속초를 관광지로 알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 당면하는 문제는 이곳에서 늘 '싸가지 없는' 장시꾼들을 만나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이곳에서 오랜 기간 실아보지 않았던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든 문화의 일부분이다. 일테면 횟집에서 기본으로 깔아주는 밑반찬(스끼다시)을 생략한다거나 처음 만난 손 아랫사람에게 자연스럽게 반말을 건네는 상인들을 대하는 것은 여간 벅찬 일이 아니다.


아무것도 없는 척박한 땅에서 삶을 일군 사람들이 혹은 자신도 여차하면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외지 사람들에 대한 요상한 타박스러움은 건너 동네 양양이나 양아치 동네 강릉에 비길 것은 아니라지만 속초도 사실 묵인해버릴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이북 특유의 싸늘한 대화법은 할머니와 손녀 간의 대학에서도 잘 나타난다. 한 번은 실향민 촌인 아바이 마을에 살고 있는 친구 녀석 집에 간 적이 있는데... 학교를 다녀오자마자 시내로 친구들과 놀러 가려고 준비하는 중학생 손녀에게 생선을 말리던 할머니가 넌지시 던지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 정도는 상냥한 충고에 속한다고 하면 서울 친구 녀석들은 배꼽을 잡고 웃는다.


"야~이 호로 간나이 새끼야. 니 애비에미가 시퍼러 둥둥한 바다에 나가 올레뛰고 내레뛰고 괴기잡아서 사람 맹근다고 핵교엘 보내 놨더니, 니 시방 공부는 아니하고 길바닥에 나가 암캐 수캐 냄새 맡고 댕기니. 야이~ 죽을 쌍 깔라야. 니 언제 인간 될 리니... 빨리 처 안 들어갈래?"



사실 속초가 어떤 동네인가를 말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속초의 인문학적이나 역사학적이나 환경학적이나 이런 건 애초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데다가 심지어 난 현재 여기서 살고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나의 많은 친구들과 가족들이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기에 나는 그들보다 이곳을 더 많이 알고 있지 못하다. 고백하건데 내가 기인하는 속초에 대한 기억은 사실 유년의 그것에 멈춰져 있다. 그리고 그 유년기의 추억은 나에겐 잔혹한 추억이기도 하지만 버릴 수 없는 생명줄 같은 연민이기도 하다. 속초는 그러한 내 기억의 의존 속에서만 상상이 가능한 추억의 도시이다.


예전의 그 골목길을 걸으며 생각하건대 나는 그 때 유년시절 이후로 과연 즐거운 생을 살고는 있는 것일까? 하는 자문을 해보게 된다. 손바닥만 한 작은 도시에서 이런 작은 곳에다 쓸 수도 없을만치 파란만장한 이야기와 상상들을 꿈꾸었던 시절만큼의 즐거움이 있었는지 되물어 본다. 답은 역시 그럴싸하지 못했다. 겨울철 골목길이 너무 쓸쓸해서도 일 수도 있겠으나 여전히 가난한 건 나의 마음뿐만이 아니라 실존하는 생활의 무게에도 진행형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연어도 아닌데 인생을 살면서 자기가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열망을 지닌 사람들을 이처럼 많이 본 도시는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나의 고향 속초는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열망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이상한 땅이다. 마음속의 고향이라도 그리워하는 이가 있다면 분명 그는 투박하지만 정이 있는 사람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희망이 좌절될 것이 분명하다면 그 사람들에게 속초는 여전히 유배의 땅이 될 것이며 그 염원은 긴 시련으로 각인될 것이다.


20년을 살았던 도시이면서도 속으로 들여다보면 아는 것이 전혀 없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나는 단지 공허한 도시의 골목에 추억이라는 껍데기만 뒤집어 씌어놓고 시시덕거리는 광대에 불과한 놈이라는 것을 차가운 바닷바람에 뺨을 맞아가며 알아차렸다. 사람들이 떠나는 도시. 유동인구 12만의 작은 소도시. 바람도 재산이라며 바람까지 팔아먹어가며 희대의 사기극으로 만들어진 리조트. 정체성이 없는 지역축제로 몸살을 앓는 도시. 원조라는 순두부 할머니만 대략 3백 여명이 먹고사는 원조도시. 여름 한 철 장사로 겨울까지 나야하는 자원 태부족의 소비도시. 그렇게 속초를 알아가는 키워드는 좋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내 마음속 고향은 사실 그리기 나름이라고 생각했다. 빈 골목에서 주섬주섬 추억을 꺼내 진한 크레용으로 다시 그려보는 어설픈 산보. 친구들은 간데없고 꼬마들의 소음도 들리지 않는다. 양아치들의 우격다짐도, 중앙동 서울오락실의 제비우스 효과음도 들리지 않지만 그 모든 것은 바로 여기 내 마음에 있다. 내가 다시 그려보는 데로 존재하는 것이다. 내가 느끼는 도시 속초는 그렇게 보잘것 없지만 나에겐 아직 돌아가야 하는 그리고 유일하게 돌아갈 수 있는 하나밖에 없는 '유년의 땅'인 것이다.


X-pan 145mm F4 Fujinon / Delta 4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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