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어느 늦 여름의 이야기
그는 손을 들어 바로 자신의 책상 앞에 위치한 스탠드의 전원을 다시 켰다. 스탠드가 켜지자 그의 책상은 하얗게 눈이 내린 것처럼 순간 환해졌다. 그는 책상 위에 죽은 자의 그것처럼 너절하게 널려있는 쓰다만 편지지들을 한동안 멀끔하게 들여다보며 생각에 빠진다. 그때 가느다란 계절의 바람이 실렁이며 그의 목덜미를 훔친다. 계절의 변화는 아주 잠깐이지만 어떤 사람들을 그로 하여금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는 중국에서 친구가 가져다준 짝퉁 몽블랑을 이리저리 만지다가 뚜껑을 열었다. 실렁이던 바람이 다시 그의 옆에서 너울거린다. 담배를 태우기 위해 잠시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요세미티같은 징그런 내음이 번진다. 그리고 그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가 나를 생각한 것은 오래전부터였다. 그는 여름이 지나갈 때마다 짐승 같은 슬픔을 느끼며 또 다른 한 해가 가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는 색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사는 방식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 자연스럽지 못하고 철저하게 교육된 스케줄로 꽉 찬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큰 곤욕스러움으로 여겼을 법한 그런 일상적인 사람이었다. 실상 그런 사람쯤은 여기저기 너무도 많았다. 택시를 타도 언제나 술이 깨어 있을 때는 기사와 지독한 논쟁을 벌여야 하고 그러다가 스스로가 뭐에 홀린 사람처럼 그것조차 귀찮아져 그렇게 말소리를 닫는 전형적인 보통사람이었다.
게다가 도대체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가 무엇이 그리 중요한가라며 반문까지도 하는 약간은 질리기도 하는 변종쯤이기도 했다. 담배를 태우며 그는 다시 펜을 들었다. 오늘 이 편지를 마치지 않으면 잠을 청하기가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을 한 듯싶다. 나는 창문 앞에서 바람에 쫓기는 하룻짐승 같은 존재가 되어 슬쩍 들여다볼 뿐이다.
사실 나는 그를 오래전부터 보아왔다. 그의 성장기에 아주 중요한 시간 속에 나는 언제나 각인되어 그와 함께 하곤 했다. 그는 나를 배경 삼아 어릴 적 조그만 운동장에서 그늘이라는 즐거움을 진득하게 배웠고, 크면서는 설렘이라는 단어의 정체성을 알아가는 성숙함을 몸소 체험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늘 내가 비켜갔었던 다른 길 위에선 지독히도 염세적이고 자기부정적인 괴변을 늘어놓는 한량이기도 했다.
내가 그를 바라보면서 그도 비로소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는 언제부턴가 인간들 틈에서 살면서도 지극히 동물적인 감각으로 나를 차분하게 바라보곤 했는데... 가끔은 나와 눈까지 마주칠 정도로 우린 서로 교감이라는 것을 짧게나마 나누기도 했다. 그런 그의 편지 쓰기의 강박관념은 그래서 내가 보기에도 아주 일상적이 되어버린 어떤 단계 정도로 밖에 비춰지질 않았고 그때마다 언제나 그는 그의 짧은 글을 누군가에게 보내는 것을 매년 겪는 어떤 전쟁처럼 치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매일 알을 낳는다. 그 알속에는 수많은 메시지들이 하나의 생명을 지니고 차곡차곡 포개어져 있는 덩어리들처럼 담겨져 있다. 하루가 시한부 생명인 그 상념들은 일상이란 두터운 알을 깨지 못하고 자기 부화 과정에서 곤계란이 되어 그렇게 쓸쓸하게 부패되어 버려진다. 그는 오늘 그렇게 부패된 낡은 알들을 책상에 가득 모아 놓고 위험스럽게 그것들을 깨어 본다.
어떤 것은 심하게 부패되어 존재 그 자체의 의미를 잃어버린 것들도 있지만 어떤 것은 그런대로 아직 싱싱하게 살아있는 녀석들도 있었다. 그는 부패되어 있는 것들을 차례로 정리하고 아직 만지작 거릴만한 녀석들을 골라 짜깁기를 시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살아있는 것이라고 해봐야 상념과 자책만 가득 한 것이어서 실제로 그것들을 어떻게 요리할 것인가에 대해선 그 역시 몹시 난감해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힘들게 글을 써내려 간다.
"늦은 여름... 갑자기 서늘한 바람이 나를 스쳐갔다. 순간 나는 그 바람에 내 몸이 들로 갈릴 것 같은 위기감을 느꼈다. 그저 서늘해진다는 것이 일상의 무서운 흉기로 다가오는 듯한 자기기만적 상상은 지금 극도로 위태로운 나의 일상에 무게를 한 겹 더 얹어주고 있는 꼴을 만들고 있다. 나는 기포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생각했다. 나의 기억들을 생선의 알처럼 입안에 가득 품고 돌아다니다가 어느 날 갑자기 푸하하~하고 웃어버리면 그곳에서 내 기억들은 순식간에 부화를 진행한다. 나의 여름은 그 부화를 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들이었다. 사람들은 여름이라는 특정한 계절에 추억과 동경이라는 이미지를 중첩시키고 홀로 외로운 자아들까지도 보듬어 배려하는 유일한 시기라는 것을 알았다. 수많은 색으로 이루어진 여름은 그렇게 추억을 잉태시키는 격렬한 잉태의 나날들이었다. 끝도 보이지 않는 숲길을 걸어 들어가는 듯한 어린 시절... 푸른 바다... 그리고 뾰쪽하게 깨어져 바닷속에서 나를 시커멓게 쳐다보던 그 심해어들까지"
나는 그의 단어들을 오래 쳐다볼 수 없었다. 나는 바람에 일단은 실려가야 할 운명적인 신세였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그물 같은 조직 속에서 '초인'의 존재를 믿어야 하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우울증 환자였다. 시간의 역사에 대해 그는 많은 생각을 하는 편이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피조물들이 발전이란 명제 앞에서 기득권을 형성하는 것을 어린 시절부터 뼈저리게 보아왔고 무엇이든지 혁명적인 가치 아래 자신들의 손으로 역사를 쓰려고 했던 영웅들의 허망함도 눈물을 흘리며 함께 느끼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같은 인간으로서만 느끼는 것일 뿐 자신에겐 아무런 의지조차 형성하게 하는 힘이 되어주지 못했다. 그에게 화두가 되어준 것은 역사도, 문명도, 영웅도 아닌 단지 뜨거운 여름의 기억이었다. 그가 여름을 정리하는 것은 그래서 그의 주된 일상이 되어버린 듯했다. 그 여름이 바로 나다. 그가 나를 정리하는 것은 어쩌면 내가 그를 정리하는 것과 같은 꼴이다. 나는 그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를 실업자로 분류한다. 실업자란 자신이 일을 하고 싶지만 사회적 환경 탓으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생계수단을 이어가지 못하는 조직에서 배제된 어떤 인간들의 부류를 지칭히는 단어였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실업자로 분류하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그의 글쓰기는 그러한 이유로부터 자유로운 의지를 보여주는 단기적 방어기제의 적절한 수단이 될 것이라는 자위가 늘 함께 하고 있었다. 그것이 가장 위태로운 계절인 바로 여름의 경계였던 것이다.
그를 인생 내내 오랫동안 지켜내 온 그 여름이 가고 있다. 서늘함에 목을 베일 것 같은 위기감은 그를 서둘러 방어벽을 치게 했다. 무사 만루 위기를 자초하고 던질 구질이 없어 땅을 내려다보고 있는 구원투수의 심정으로 마운드 위에 올라와 있는 느낌이 든 것이다. 우스꽝스럽게 표현된 닌자의 심각함처럼... 여름은 그의 일 년이었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그것을 알게 되기까지 많은 사건들을 경험할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떡 주무르듯이 써 내려간 글들을 조심스레 살피고 편지지를 접어 봉투에 넣는다. 밤은 이미 깊어져 있고 아파트 단지 뒤에선 날카로운 암 고양이의 교미 소리가 귀를 찢듯이 거북하게 들려온다. 발신인에 자신의 이름을 기업하고 수신인란에 무엇을 쓰려다가 그냥 봉투를 봉인한다. 그리고 편지들이 쌓여있을 법한 두터운 상자 하나를 꺼내어 거기에 편지를 넣는다. 그곳엔 자신의 여름에게 보낸 수많은 편지들이 빼곡하게 쌓여 있었다. 기억의 무덤으로 불리는 그 상자 속에서 그는 비로소 존재하고 있었다. 파일들이 그를 살아있게 하는 듯이 보였다. 갑자기 졸린 기운이 온몸을 감싼다.
그때 그의 지인에게서 메시지가 하나 날아왔다. 오로라를 보러 노르웨이로 떠난다는 간단한 메시지였다. 그는 그 메시지를 보면서 갑자기 살만큼 벌었기 때문에 바다로 떠난다는 포르투갈의 어느 대장장이를 떠올렸다. 세상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런 질문을 누구에게 한다는 것은 일상적 노동자의 입장에서 보면 극히 사치스러운 고민이어서 그는 마름 침을 발라가며 늘 거짓 같은 동문서답을 하곤 했었는데.. 지인의 메시지는 그런 것들을 한방에 정리해 주는 느낌이 들었다.
여름과 오로라... 그의 마음속에 동화가 새로이 그려졌다. 그리고 그해 여름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복잡한 이미지만 남겨두고 소리 없이 사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