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지 않았다 / 티볼리

티볼리(Tivoli)

by 다모토리
여긴 왜 이렇게 비싼 거니?

캠핑카 여행을 떠난 이후 독일-네덜란드-체코-독일-스위스를 거쳐 어느덧 이탈리아 국경을 넘어왔다. 이탈리아는 개인적으로 이번 여행 중 우리가 가장 기대한 여행지 중 하나였다.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지닌 나라. 유럽에서 가장 많은 볼거리를 안겨주는 나라. 하지만 지금은 비수기. 겨울에 여행을 하게 된 우리는 이태리의 날씨가 캠핑하기에 좋은 지중해 기후일 뿐 아니라 물가도 다른 유럽 국가보다도 쌀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우리가 로마의 캠핑장에 차를 파킹 하던 날부터 슬슬 꼬이기 시작했다.



물론 날씨는 기대했던 대로 겨울이지만 포근한 봄 날씨~ 그럭저럭 대만족! 하지만 이태리의 살인적인 물가는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6인승 캠핑카로 캠핑장에서 하루 밤 캠핑을 하는데 드는 비용은 무려 75유로. (15년 전 가격이니 지금은 어마 무시하게 올랐을 수도 있겠다) 허걱, 이럴 수가! 서울에서 새로이 합류한 팀원이 3명이나 더 있었다고는 하지만 지금까지의 캠핑장 요금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눈이 툭 튀어나오는 비싼 요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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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어찌 하룻밤을 지내고 하루치를 계산하고 난 뒤 우리는 혀를 내두르며 당장 캠핑장에서 차를 빼서 나오고야 말았다. 당초 며칠 동안 캠핑장에 차를 대고 넉넉하게 로마를 여행하기로 했던 우리 일행은 처음부터 값비싼 캠핑 요금에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일정을 서두르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로마의 캠핑장을 나와서도 살인적인 물가는 우리를 여전히 괴롭히고 있었다. 캠핑장 가격뿐만 아니라 기름값도 다른 나라보다 곱절이나 비쌌고 연비는 당연히 더 떨어졌다. 참고로 연비가 가장 좋은 경유는 역시 프랑스산이었다.



친구는 이렇게 높은 물가에서 사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신기하다고 까지 했다. 그런 이탈리아의 살인적인 물가에 우리는 벌써부터 지갑 단속을 해야 했다. 로마의 캠핑장이 비싼 이유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로마라는 특이한 도시 이력이 한몫을 하고 있었다. 로마는 사실상 일 년 내내 관광을 위한 버스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없을 정도로 교통이 최악이었다. 성수기 시즌에는 로마 사람들이 출근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라고 하니 대충 그들의 고충이 이해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관광시즌엔 관광버스를 시내로 들어오지 못하게 차단한다니 돈을 쓰러 오는 사람들도 막는 형국이라 우리로선 그저 막연하게 부럽기도 했지만, 여행을 하는 입장에서 당해보니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었다.



동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웬만한 관광객들은 로마 인근에서 캠핑을 하면서 자전거나 버스 등의 대중교통으로 시내 관광을 하는 것이 예사여서 캠핑장 수요가 많아졌고 당연히 요금이 올라간 것이다. 로마의 유명세와 벅적거림을 이해한다고 해도 그 화를 우리가 직접 당하니 좀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여름 시즌도 아니고 겨울에 요금이 이 정도니 관광객들이 폭증하는 여름휴가철엔 얼마나 비쌀까? 이런 생각을 해보니 그야말로 아찔했다. 이런저런 이유를 달아 우리는 만장일치로 복잡한 고대도시 로마를 그냥 제치고 다음 일정을 향해 곧바로 캠핑카를 움직였다. 일행들도 모두 로마를 한번쯤은 다 거쳐 간 터라 별다른 미련은 없었는데, 그보다는 아직 보지 못한 고대의 도시들이 이태리에는 너무나 즐비하니까 일정도 아낄 겸 비싼 로마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기로 결정한 것이다.


Vicolo cieco (막다른 길)

그렇게 로마를 벗어나 처음 찾아간 곳은 로마에서 대략 40km 정도 떨어진 고대 로마의 휴양도시 티볼리(Tivoli)였다. 고대 로마인들의 별장지이자 휴양지인 티볼리는 로마의 역대 황제들의 별장지를 비롯해 부유층들이 만들었던 골목과 집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멋진 휴양도시였다. 특히나 가는 골목마다 이태리가 아니면 보여주기 힘든 청국장 같은 느낌의 꼬랑꼬랑한 집과 골목들이 잔뜩 들어서 있고 이곳에 사는 사람들도 지중해 날씨답게 천연덕스럽고 편안해 보였다. 진짜 인상적인 것은 이곳 사람들의 걸음이 굉장히 느리다는 것이었다. 빨리빨리와 대충대충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는 내가 보기에는 도심 전체가 슬로 모션으로 움직이는 세트장 같았으니까. (15년이 지난 지금, 나는 이 걸음걸이를 진짜 배우고 싶어 졌다)



특히 고대인들의 삶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수많은 골목은 당시 그들이 어떤 집에서, 어떤 사람들과, 어떤 생활을 하고 살았는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아주 오래된 골목을 걷고 있노라면 돌길 아래에서, 혹은 낡은 창문 안에서 그들이 나에게 들려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타임슬립을 하는 느낌으로 낡은 골목길과 대화하는 즐거움은 역사책에선 절대 찾을 수 없는 이런 여행만이 주는 특혜인 셈이다.



우리는 로마의 평원이 바라다 보이는 어느 레스토랑에서 이태리 음식으로 점심을 맛나게 먹고 나서 - 이날 점심은 손님들이 멋지게 한턱 쐈다. (여행 중 돈이 궁할 땐 전 세계 어디에서도 그저 얻어먹는 게 최고의 방책이다) - 황제의 별장이 있다는 '빌라 아드리아나'를 찾아가기 위해 차를 몰고 티볼리에서 내려왔다. 그곳은 1999년에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의 별장인데 우리가 가진 미쉘린 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을 정도로 작은 마을이라 이 골목 저 골목을 한참 동안 헤매다가 우여곡절 끝에 우린 조그만 도로가 산 중턱에 난 작은 언덕길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 길이 맞겠지? 하며 반신반의를 가진 채 들어선 이 길은 양쪽으로 올리브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던 조그만 비포장 도로였다. 내비게이터를 자처하던 나는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든 것 같아 운전하고 있던 친구에게 불안감을 내비쳤다. 그러자 친구가 너스레를 떤다.


'괜찮아, 못 찾으면 어때, 모든 길을 로마로 통한다고 하잖냐'


하긴 그래. 어디로 가든지 로마로는 돌아가겠지 뭐. 멀지도 않은 길인데. 우린 결국 그 찾기 쉽다던 빌라 아드리아나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로마로 돌아가 다음 일정인 폼페이로 향하기로 했다. 그런데 나 참. 이 조그만 길이 끝도 없이 더욱 깊숙한 올리브 숲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자꾸만 좁아지는 길을 바라보며 조금은 불안해했지만 친구 녀석이 길을 안다고 딱 잡아 때면서 안심을 시킨다. 그 말 한 방에 나 역시 길 찾는 고민을 그만 딱 끊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 어둑어둑 해가 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우리가 우연찮게 접어든 그 길은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도무지 내려가는 길이 나오지 않았다. 더욱 곤란한 것은 좁은 도로 사이의 올리브 나뭇가지들이 캠핑카를 벅벅 긁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새 이 덩치 큰 캠핑카를 돌려 다시 돌아나가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만약 앞으로 나가는 길이 없다면 꼼짝없이 산속에 갇혀 버리게 되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상황. 나는 심히 불안하고 걱정이 되어 슬쩍 고개를 돌려 친구를 보니 이 자식, 자기도 슬슬 걱정이 되는지 조금씩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친구야. 이거 뭔가 잘못된 거 같은데. 쩝, 이거 로마로 통하지 않는 길도 있구먼'


친구가 속절없는 한마디를 내뱉자 계속 산으로 올라가는 캠핑카 속에서 그제야 뭐가 잘못되었다는 소리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야~ 인마, 지금 와서 그 얘길 하면 어떻게 해? 이미 한 시간이나 산속으로 들어왔는데. 아놔 진짜 미치겠네~'



그렇게 차 안에서 옥신각신하고 있는데 드디어 길의 끝이 보인다. 포장된 길은 예전에 이미 끝나 버리고 우리는 한동안 비포장길을 달려왔었다. 그리고 그 길의 마지막에는 단단하게 고정된 작은 목장의 문이 떡 하니 버티고 있었다. <Vicolo cieco(막다른 길)>이라는 푯말과 함께. 오 마이 갓! 하루 해는 이미 서산으로 넘어가고 꼼짝없이 산속에 갇힐 판이다. 주변에 인적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고, 우리에겐 전화도 없는 상태. 이거 산속에서 길 잃은 미아 되는 거 아냐?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달은 우리는 곧바로 뭔가 액션을 취해야 했다. 이런 곳에서는 캠핑카가 마냥 구세주가 될 수는 없었다. 로마에서 비싼 물가에 허겁지겁 나오는 바람에 충분한 배터리 충전과 물을 싣지 못했고, 음식도 별로 없는 상태였다.


그 사이 누군가 아까 오던 길에 작은 공터가 있었다고 귀띔한다. 거기까진 일단 후진으로 어떻게라도 가서 차를 한번 돌려보자는 얘기가 나왔다. 그래, 문제가 있으면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우리의 좌우명. 그런 다짐은 이런 곳에선 큰 도움이 되었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빨리 여기서 빠져나가야 하는 긴박한 상황. 친구 녀석은 미안한지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조심조심 차를 후진시킨다. 드디어 작은 공터에 나오자 모두들 캠핑카에서 나와 캠핑카를 들치고 밀면서 회전을 시도했다. 움푹 파인 구덩이에 돌을 얹어 고이고 최대한 작은 회전반경으로 캠핑카를 돌려세웠다. 그러다가 한 번 바퀴가 툭 하고 빠지는 난리법석을 떨고 나서야 캠핑카를 오던 방향으로 다시 돌려세울 수 있었다. 휴~~ 그런 난리법석을 떨고 나니 해가 똑하고 서산 너머로 떨어졌다. 우린 라이트를 켜고 좁고 거친 비포장도로를 한참 동안 거북이처럼 기어 나왔다. 그러자 누군가 뒤에서 이런 말을 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지 않아... 그지 않냐?'


깨달음 없는 천진난만한 여행객들


그 넓고 넓은 로마로 통하는 길을 찾지 못한 우리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지 않는다는 누군가의 농담에 비로소 웃을 수 있는 여유를 되찾았다. 한숨 돌린 것이다. 이젠 로마로 갈 필요가 없어졌다. 큰길로 무사히 나온 캠핑카는 그제야 로마를 비웃듯 기수를 아래로 돌려 폼페이로 향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 한 가지를 깨달았다. 아직도 캠핑카를 쌩쌩 달리는 차로 생각하는 마인드가 지배적이라는 것이다. 캠핑카는 움직이는 집이었다. 이렇게 덩치가 큰 집을 끌고 산속 길을 헤매는 우리는 아직 진정한 유러피안 캠퍼의 마인드를 습득하지 못한 것이다. 만약에 이 풍경을 이태리 사람들이 봤다면 얼마나 우리를 비웃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니 창피한 마음이 땀으로 변해 등골에서 질질 흐른다.



물가가 비싼 로마에서 도망쳐 나와 너무나도 만족스러웠던 고대의 휴양지 티볼리에서 안주하지 않고 또다시 욕심을 부려 지도에도 나와있지 않은 볼거리를 탐하던 우리에게 또 다른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 온 것이다. '캠핑카를 목적지에 세우면 지겨워질 때까지 충분하게 그 마을을 즐기라'는 캠핑카 선수들의 조언을 무시한 결과는 다시 한번 쓰라린 교훈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우리는 좀 더 여유를 가져야만 했다. 어떻게 하면 여유를 가지고 여행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며 그날 밤 우리는 이탈리아의 어느 작은 해안마을에서 싸구려 와인을 잔뜩 부어라 마셔라 하면서 얘기하고 또 토론했다. 그리고 결과는 어찌 되었을까?



창피하지만 모두 취해서 캠핑카의 자기 자리에 꼬꾸라져 코를 골고 자는 것으로 일단락이 났다. 한밤중에 누군가 잔뜩 취한 목소리로 '역시 캠핑카야!' 하는 주정 거림만이 캠핑카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반성은 없었다. 그런 게 캠핑카 여행이지 뭐! 하는 분위기가 대세였다. 그렇게 깨달음 없는 이탈리아 휴양지의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꿈속에서 '내일은 조금은 천천히, 조금은 오랫동안 이곳의 풍경을 즐겨보자'라는 기억나지 않는 다짐을 했었던 것 같다. 마치 언젠가 꼭 하고 싶었던 잠꼬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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