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캠핑카 죽다 살아나다/오르비에토(Orvieto)

오르비에토(Orvieto)

by 다모토리


'어? 어!!!...... 야! 차 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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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뒷자리에 앉아 졸고 있던 친구가 소리쳤다. 하마터면 차가 벽에 닿을 뻔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잠시 합류했던 국내 일행들을 로마에 내려주고 곧장 북쪽으로 달려 아탈리아의 중세도시 오르비에토(Orvieto)에 도착한 것은 오후 6시 40분쯤. 해는 이미 오래전에 졌지만, 그래도 오르비에토를 한번 둘러보고 저녁을 먹자는 의견이 있어서 캠핑카를 끌고 성 안으로 들어온 것이 화근이었다. 젠장, 그렇게 캠핑카는 차가 아니라 집이라고 각성하고 또 각성했지만 해만 떨어지면 다 공염불이 되었다.


그렇다. 원래는 도시 외곽에 캠핑카를 세워두고 대중교통이나 걸어서 도심으로 들어가는 것이 정석이지만,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도심으로 들어가려면 끝도 보이지 않는 긴 오르막을 걸어야 했기에 무작정 올라가 봤던 것이다. 그런데 캠핑카를 타고 성문을 지나 도심으로 들어가자 높이 솟은 건물들과 가파른 계단, 그리고 그 사이로 난 좁은 도로가 보란듯이 떡하니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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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정말 길이 이렇게나 좁을지 몰랐다. 마티즈나 티코 정도? 아니 마차정도나 지나갈 수 있을까? 도심 안에서는 캠핑카는 커녕 중형차 한 대 보이지 않았다. 문제는 그 사실을 이미 성 안으로 한참을 들어와서야 알게 됐다는 것이다. 차 한 대조차 지나갈 공간도 없는데 차를 세울 곳이 있을 리 만무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도심 밖으로 나가 캠핑카를 세워놓고 다시 들어오자고 결정하고 내리막길을 택했다.



그런데 아뿔싸! 재수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했던가. 한 200미터나 내려갔을까? 지금까지는 그런대로 괜찮았는데, 바로 앞 길 양쪽 건물의 2층 바깥벽과 테라스가 도로 쪽으로 툭하니 돌출되어 있었던 것이다. 영락없이 캠핑카 지붕이 벽에 가서 꽝하고 부딪힐 것이 불 보듯 뻔한 상황. 삼척동자가 봐도 지나가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어쩌랴. 도심으로 들어온 이후 차를 돌릴 공간은 아예 없어졌고, 육중한 차체로 인해 후진을 하기에도 경사가 너무 가팔랐으니. 어쩔 수 없다. "죽어도 고!" 일수밖에 없는 상황. 맨날 '죽어도 고'를 만드는 이상한 여행객들. 우린 정신이 나가도 한참이나 나간 삼류 캠핑족들이 아닐 수 없었다.


운전대를 잡은 친구를 두고 차에서 내렸다. 난 바로 앞 골목으로 달려 내려가 혹시 이쪽으로 오고 있을 다른 자동차가 있는지 살펴보고 난 다음, 차 앞과 차 뒤를 번갈아 가며 벽과의 간격을 살핀다. 두 쪽 모두 양 옆의 벽과 채 2~3cm도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야말로 살얼음판이다. 그냥 일자로 난 길이었으면 그나마 나았을 텐데 경사는 있는 대로 진 데다가, 좁아터진 골목은 왼쪽으로 꺾어져 있고 도로 바닥 역시 안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다. 설상가상이다.


혼자서 캠핑카를 기울이기는 어불성설인 상황. 지나가던 관광객들과 배 나온 동네 아저씨들까지 합세해 캠핑카를 양 옆에서 밀어 지탱하며 천천히 앞으로 차를 빼기 시작했다. 아찔! 조금이라도 힘의 균형이 깨질라치면 차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마치 벽에 스치듯, 캠핑카는 그렇게 천천히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식은땀이 절로 났고 긴 여정에 피곤으로 풀렸던 두 눈은 부릅!하고 떠졌다. 그렇게 힘쓰길 한 참. 다행히 우리 캠핑카는 난코스를 별 탈 없이 통과하긴 했다. 하지만 우린 그 식은 땀을 유럽을 여행하는 내내 흘려야만 했다.



작은 판단 실수 하나가 우리 모두에게 커다란 짐으로 다가온 또 하나의 사건이었다. 암스테르담, 올리브 숲, 나폴리까지 겪으면서도 고쳐지지 않는 이 숙제. 이 어리숙함. 이제 서야 캠핑카 여행이 그저 만만치만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여행이란 같이 하는 것이기에 가끔은 각자 다른 의견이 있을 수도 있다. 그래도 서로 지켜야 할 것들은 반드시 지켜야 큰 사고가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는 시간. 성벽이 있는 고대도시에는 절대 캠핑카를 몰고 기어 들어가지 말 것!이라는 철칙 말이다.


슬로시티의 끝판왕 _ 오르비에토

중세도시 오르비에토는 이탈리아가 품은 빛나는 보석이다. 1999년 경 이탈리아에서 패스트푸드의 반대 개념인 슬로푸드 운동이 시작되면서 결국 슬로시티라는 개념이 파생되었다. 그 본부가 있는 곳이 바로 오르비에토(Orvieto)이다. 슬로시티는 말 그대로 '공해 없는 자연에서 전통문화와 자연을 보호하면서 자유로운 옛 농경시대로 돌아가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데, 특히 느림과 여유를 찾아 삶의 질을 높이자는 국제운동이다. 현재 30개국 238개 도시가 슬로시티로 인증되어 있다.



그런 측면에서 이탈리아의 오르비에토는 그 옛날 중세도시를 그대로 옮겨 놓은 도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주요한 도시를 캠핑카로 탱크 밀듯이 하면서 기어들어갔으니 국제 망신도 이런 국제 망신이 없었을 것이다. 암튼 이 사건으로 또 한 번 식겁한 이후 우리는 오르비에토 성곽에서 아주 멀찍한 외곽으로 차를 옮기고 나서야 진정한 슬로시티를 온 몸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로마에서 북서쪽 96㎞에 위치한 오르비에토는 해발 195m 바위산 위에 도시가 형성되어 있다. 그래서 까마득한 오르막 길에 식겁한 우리가 차를 몰고 그냥 올라갔던 것인데 --; 물론 이게 다 이유가 있었다. 중세시대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은 대부분 이민족의 침략을 피해 주로 산 정상에 마을을 세웠다. 하지만 그만큼 교통의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고 자연스레 자급자족이 이뤄지는 봉건사회가 형성된 것이다.


고대 문명도시인 로마가 망한 이후 이민족의 침략에 극도로 공포를 느끼던 사람들은 언덕 절벽에 마을을 짓고 꽁꽁 들어가 사는 삶을 택한다. 이 때문에 성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미개척지인 숲은 그들에게는 공포의 대상 그자체였다고 한다. 재미난 얘기로 유럽의 동화에 자주 등장하는 모든 숲속의 마녀 개념은 이 시기에 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오르비에토를 소개하는 가이드 북에 재미난 구절이 보인다.


오르비에토는 마을 아래에서 마을 전경을 올려다보면 다양한 시대의 거주지 유적을 확인할 수 있다. 신석기시대부터 만들어진 동굴이 도시의 가장 아랫부분에 그대로 매장돼 있고, 그 위에 중세시대 형성된 건물 등이 올려져 있다. '석조 문화'가 중심이었기 때문에 겹겹이 건물을 올려도 고대 유적들이 파손되지 않고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신석기 시대부터 중세시대 모습이 고스란히 중첩되어 쌓인 오르비에토에는 대부분 차량이 들어가지 못한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폭이 마차가 오갈 정도 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길을 우리가 캠핑카로 들어가려고 했었다. 이탈리아 전역에 어글리 코리안으로 뉴스가 날 뻔 한 대소동이었다. 그런데 골목이 좁은 덕에 이로운 점도 있다고 한다. 지중해의 뜨거운 햇살을 건물이 막아주기 때문에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쉴 수 있는 그늘이 많기 때문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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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르비에토의 성지인 두오모 대성당을 지나 길거리 야시장을 산책하며 고성의 옛길을 즐겼다. 오르비에토는 고산 지대지만 비옥한 토양을 갖고 있어 의외로 농산물이 풍부하다.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백포도주는 와인의 나라 이탈리아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품질이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다.


마을 어귀 곳곳에 와인가게가 즐비하고 식당에서는 지역의 슬로푸드를 직접 판매하고 있었다. 이 지역에서 나는 신선한 채소 등을 이용해 요리한 소시지와 베이컨은 맛이 정말 좋았다. 그런데도 식당 주인은 맛보다 음식 재료에 대한 설명과 자부심이 강한 듯 연신 지역 먹거리 자랑에 여념이 없다. 괜히 이곳이 '슬로푸드'의 성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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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시티는 옛날 그대로 멈추어 있는 도시가 아니다. 전통을 지키고 보호하는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빨리빨리와 성과를 내야 하는 조급증이 살아있는 우리나라에서 슬로푸드와 슬로시티가 정착되는 시기가 느려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조금만 걸어가도 곧 죽는 줄 알고 움직이는 집을 메고 지고 성 안으로 기어들어가는 이 짠내 나는 어리숙함은 우리가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많음을 단적으로 상징하는 멍청한 사건이었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돈으로 모든 삶이 돌아가는 자본주의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 독점재벌이 돈 때문에 공동체의 질서를 무시하는 것이 다반사이며, 그러한 삶의 구조속에서 많은 서민들은 진정한 공동체 의식을 가질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다. 슬로시티는 자본보다는 인문이 중심이 되는 사회를 기반으로 한다. 우리나라가 가지고 있는 오랜 전통과 인문의 깊이는 유럽의 지성에 못지않다고 본다. 하지만 그것을 올바르게 삶의 환경에 적용시키는 노력을 너무 게을리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문하게 되는 슬로시티의 산책길이었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너무 절벽 위 성곽도시가 많다고!!! --;


천천히. 더불어. 다 함께. 공동체 같은 단어가 한참 동안 나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오르비에토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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