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떠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너무도 많다
하지만 어떤 여행인가에 따라 그 준비물은 전혀 달라지게 마련이다. 사실 이번 여행을 하는 동안 조그만 숙소이기도 하고 움직이는 교통수단이기도 한 캠핑카에는 여러 권의 책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아마도 배낭여행이거나 패키지여행이었다면 이렇게 많은 책들을 가져오지 못했겠지. 그런 면에서 보면 캠핑카 여행은 독서여행이랄 수도 있다. 캠핑장에 차를 대고 빨래를 시원하게 해결한 후 따뜻한 커피 한 잔을 테이블 위에 놓고 느긋하게 즐기는 독서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즐거움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론리 플래닛과 여러 권의 디키 시리즈 여행 책을 잔뜩 서랍 속에 쌓아두었다. 우리 일행의 책들. 일본 제국주의를 로마에 빗대 자랑스럽게 떠들어대는 좀은 언짢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몇 권과 세상에 할 줄 아는 건 여자 후리는 것과 맛있는 거 쫓아다니는 것뿐이며 꼬뜨 다 쥐르가 제 집 앞마당 천국인 줄 알고 있는 무라카미 류의 색마처럼 끈적이고 느끼한 여행 요리 책 한 권이 이 침대, 저 침대를 굴러다니고, 또 한 권의 책은 어떤 얼뜨기 양치기 청년이 자아의 신화를 이루기 위해 연금술을 배우러 사막으로 떠나는 좀은 황당한- 리얼리티가 현저히 떨어지는- 파울로 코엘료의 장편소설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책들은 그저 그냥 그렇게 우리를 따라온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스페인에서 만큼은.
우리 일행이 프랑스의 망통과 꼬뜨 다쥐르를 지나는 동안 나는 무라카미 류의 책을 읽으며 그의 해박한 식습관과 변태적인 여성 편력에 대해 약간은 동감했고 그가 말한 레스토랑과 호텔 그리고 거기에 걸맞은 사람들과 자동차 그리고 멋진 카지노를 보면서 즐거운 여행은 이런 것이야 하고 내심 쾌재를 불렀었다. 하지만 그 달콤 쌉싸름한 해변 여행은 결혼 첫날밤 온몸에 문신을 하고 나타난 남편의 아찔한 과거처럼 스페인에서 와장창 하고 멋지게 깨지기 시작했다.
밤새 달려 이태리에서 스페인으로 넘어온 나는 조금씩 지쳐 있었다. 드디어 스페인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것 두 꼭두새벽에... 바르셀로나는 시 구역이 조그마한 정방형의 수없는 패턴 구조로 복잡하게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도시로 들어가 취침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사전 지리도 잘 모르고 캠핑장에 대한 정보도 구할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린 고속도로 휴게소에 취침을 하고 다음날 아침 바르셀로나로 진입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우리는 바르셀로나 남동쪽 7번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대형트럭 전용 휴게소였기에 우리는 조심스럽게 대형트럭 사이에 보이지 않게 교묘하게 차를 댄 다음 간단하게 하루를 마감하는 술자리를 마련했다. 가볍게 와인을 마시면서 지금까지의 일정을 정리하고 스페인에서의 일정을 잡아보았다. 안달루시아 지방을 거쳐 세비야 그리고 알바이신까지 형광펜으로 줄을 죽죽 그어대며 스페인 남쪽의 기행에 우린 들떠 있었다.
그때. 아주 낡은 푸른색 자동차가 '얼핏 보니 포니 2 같은' 뒤에 짐 트레일러를 달고 우리 차 옆을 뻔히 쳐다보면서 휙 지나갔다. 그 순간. 일순 불길한 예감이 우리를 스치듯 지나갔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일 뿐. 그 유명한 이태리에서도 무사하게 통과한 우리는 이미 긴장이 풀어져 있었다. 그날 밤 그 불안감은 결국 현실이 되고 말았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진입 고속도로 제 7번 휴게소에서 우리는 스페인 집시들이 뿌린 최류 가스에 취해 완전히 무장해제당한 채 노트북과 카메라들을 속절없이 무방비 상태로 털리고 말았다. 이태리 나폴리 이후 최악의 사건이었다. 스페인은 그렇게 우리에게 사정없이 친밀하게 다가왔다.
“무라카미 류의 속삭임이 그렇게 좋더냐? 등신들아. 꼬뜨 다쥐르 좋아하고 자빠졌네. 여긴 스페인이야. 정신 차리라고 이 멍청이 자식들. ”
그래! 우린 보기 좋게 제대로 뒤통수를 한 대 맞았다. 하지만 그 사건은 바로 수많은 책들 중 운명적으로 우리 캠핑카에서 함께 굴러 들어온 파울료 코엘료의 연금술사에 나오는 분명한 여행의 한 표지였다. 스페인은 그렇게 나에게 처음으로 여행의 표지를 알려주었다. 내가 이 여행에서 무엇을 느끼고자 하는 것인지. 너희는 여기에 왜 왔는지를 처음부터 다시 원점에서 생각하게 하는 그런 의심의 여지가 없는 표지였던 것이다.
사실 이 엄청난 털림 이후 우린 안달루시아니 알 바이신이니, 알람브라하 궁전이니 모든 걸 다 패스하고 무조건 직진으로 스페인을 빠져나가기로 결심했다. 스페인이 갑자기 징그러워졌기 때문이다.(물론 나중에 엄청 후회하긴 했지만 --;) 그러면서 2층 침대에서 굴러다니던 작은 책 속의 양치기 산티아고의 외침이 불현듯 내 머릿속을 가르며 쩌렁쩌렁 울렸다.
“마크 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