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병 주고 약 주고, 양아치와 라치오/ 바르셀로나

by 다모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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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진입을 시도하자마자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상쾌하게 캠핑카를 털리고 난 후 스페인 사람들이 다 도적 떼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나의 불만은 극도의 분노로 바뀌어가고 친구들 역시 후회 막급한 표정이다. 그러나 어쩌랴. 당한 걸 계속 생각하면 정신건강에도 안 좋을 뿐 아니라 혈관까지 좁아져 동맥경화를 유발한다니 (주워들은 건 많아서 ^^)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풀어야 하는 것이 육체적 건강을 보살피는 유일한 대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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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는 이제 설마 또 털리기야 하겠냐 하면서 스스로 자위하며 잃어버린 물건은 포기하고 다들 조금씩 예전의 냉정함을 되찾기 시작했다. (근데 사실 노트북은 협찬받은 것도 아니고 지인이 빌려준 것인데 써먹지도 못하고 그만 여행 중간에 홀라당 해 먹었으니. 나로선 짜증이 날 법도 하지. 뭐) 사실 입속엔 욕이 가득한데 똥 밟은 중이 구시렁대듯 그냥 꿀꺽꿀꺽 삼키면서 우리 일행은 바르셀로나 시내로 조심스레 기어 들어왔다.


하지만 정방형의 바둑판 모양을 하고 있는 거대도시 바르셀로나는 너무 넓어서 지도를 보고 있어도 어디부터 어떻게 가야 할지가 사방 분간이 안 된다. 우리는 여기서 또 한 번 사면초가에 빠지고 말았으니 람블라스 거리로 간다는 것이 복잡한 길을 잘못 들어서서 어디가 어딘지 분간이 안 되는 길에 멈춰 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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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핑카를 돌리기도 힘든 도시 외곽 아파트 단지 주차장을 돌고 있을 무렵 우리에게 또 하나의 엿 같은 일이 벌어졌다. 지도를 보고 우왕좌왕하고 있는 사이 운전석 옆으로 동네 청년 한 녀석이 자전거를 타고 쭐래 쭐래 나타나더니 운전석에 대고 뭐라고 중얼중얼 거리는 것이다. 운전을 하고 있던 친구가 이상한 눈치를 채고 내려보니 캠핑카 오른쪽 뒷 타이어 하나가 펑크가 나서 완전히 주저앉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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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머리 뚜껑이 또 한 번 열리려는 찰나. 아까 타이어 펑크 났다고 알려준 그 청년이 다시 다가와 살갑게 한마디 한다. 타이어 펑크 고치는 곳이 저기에 있으니 가서 고치란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친구는 무슨 눈치를 챘는지 그 친구를 갑자기 불러 세웠다. 그러자 이 친구 역시 무슨 낌새를 챘는지 자신을 부르자마자 냅다 자전거를 타고 줄행랑을 친다.


“ 어~어~~ 야! 저 놈 잡아....!”


바르셀로나 외곽 아파트 주차장에서 지겹게 울려 퍼진 우리만 알아들었을 그 살벌한 욕이 터지고 나서야 난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할 수 있었다. 뒷 타이어 하나가 무려 다섯 군데나 칼에 찔린 것이 보인다. 친구가 지도를 보기 위해 잠시 도로가에 차를 세웠을 때 사이드 미러로 아까 그 녀석이 타이어를 만지는 것을 보면서 뭔가 이상한 낌새를 챘다고 한다.


“아.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어. 이 스페인 씹새들이. 한번 해보자는 거야 뭐야... 도대체가.. “


우리는 순간 참았던 짜증이 봇물 터지듯 욕으로 터져 나왔다. 날카로운 칼로 타이어를 다섯 번이나 징 하게 담그고 뻔뻔하게도 운전석에 나타나 타이어 고치는 곳을 알려준 그놈은 외국 넘버를 단 차들만 골라 안보는 사이 골목 안에서 자상하게 칼로 ‘염장’을 담가주는 일명 타이어 퍽치기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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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단지 주차장 앞에서 잔인하게 퍼져버린 캠핑카를 보자니 푹 하니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어쩌랴... 우린 또 한 번 다가온 동맥경화가 무서워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한 작업으로 바로 돌입했다. 왜냐면 우리 캠핑카 때문에 아파트 주민들이 상가에 차를 파킹 하지 못하는 긴급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급하게 트렁크에서 비상용 타이어를 꺼내고 차량에 실려져 있는 타이어 교체용 승압기를 꺼내는데 여기서 또 한 번의 강력한 데미지를 받은 우리. 아뿔싸! 차 안에 들어있던 비상용 승압기가 캠핑카용이 아니라 승용차용이 들어 있는 게 아닌가? 얼씨구 이것들 봐라. 독일 넘들 자랑하고 칭찬해 주고 그랬더니. 타이어 교체용 승압기를 승용차용으로 달아 놔? 이것 참 환장하겠네. 카운터 펀치 맞고 급소마저 차인 상황.


우리는 순간 망연자실했다. 그래도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던 우리는 일단 그거라도 해보자며 돌을 깔아놓고 승압기를 펌프질 했다. 하지만 ‘혹시나가 역시나 라고’ 얼마 들어 올리지도 못한 승압기는 보기 좋게 캠핑카 무게에 짓이겨 바로 휘어져 나자빠진다. 다시 고쳐 쓸 수도 없게 완벽하게 휘어진 승압기. 이젠 방법은 하나. 캠핑카용 승압기를 사거나 혹은 트럭용 승압기를 어디서 빌려보는 수밖에.


나는 캠핑카에서 자전거를 내려 이 골목 저 골목 사방팔방으로 수소문하며 승압기 조달 작전을 펼쳐 봤지만 별무수고. 다행히 지나가던 친절한 시민이 승압기 판매처를 알려줘 후다닥 가 봤지만 거기 역시 승용차용밖에는 없다는 싸늘한 답변만 들어야 했다. 이걸 빨리 고치지 못하면 차축이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일단은 돌로 짱 박아 수평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 상태로 여기서 오랫동안 머무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고 보험사에서 나올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었지만 그렇다면 여기서 며칠을 얼마나 더 까먹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우리가 내뱉은 욕지거리가 엮여서 지구 한 바퀴를 돌았을 무렵 구세주가 홀연히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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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 준 놈이 있다면 약 줄 놈도 있다고 누가 그랬던가? 녹색의 커다란 청소차량을 끌고 나타난 그 친구의 이름은 ‘라치오’. 이 구역 아파트 청소차량을 운전하는 20살의 어린 청년이다. 그 친구는 이 길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우리가 캠핑카 타이어를 갈지 못해 끙끙거리는 모습을 보고는 차를 돌려 우리에게로 온 것이다. 서로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난처한 상황은 누구나 다 몸으로 깨닫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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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치오가 바로 우리에게 한 제안은 자신의 청소차량에 붙어있는 기중기로 캠핑카 뒤편을 들고 있을 테니 그때 타이어를 갈아보라는 것이었다. 오호~그런 방법이 있었군. 우린 쾌재를 부르며 일을 도왔다. 하지만 호사다마라. 캠핑카 뒷 범퍼에 밧줄을 달고 들어 올리려니 뿌지직하고 범퍼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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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동 : STOP!!!!!!!!!!!!!!!! "


범퍼 부서지는 것을 아무도 바라지 않았던 우리의 난리통에 라치오는 차를 원 상태로 다시 내려놓았다. 상황은 바뀐 게 없었지만 우리의 맘은 조금씩 풀어지기 시작했다. 처방전이 들지는 않았지만 스페인에서 처음으로 약사를 만났다는 게 우리에겐 그나마 위안이었다. 별 도움을 못준 라치오가 사라지고 난 다음, 한동안 캠핑카 안에서 보험사 전화번호와 스페인 연락처를 찾고 있는데 밖에서 빠~앙하는 소리가 들린다. 내다보니 그 청소차량이 다시 돌아와 있다. 이번엔 제대로 된 트럭용 승압기를 가지고서 말이다. 이런 기특한 녀석이 다 있나? 라치오야~ 바로 네가 진정한 구세주가 아니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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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원더풀을 외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자 그도 흡족해하며 직접 승압기를 걸어 펌프질을 시작한다. 서로 돌아가며 얼마나 승압기를 힘차게 밀어 올렸을까. 드디어 타이거가 들어가고 뺄 정도의 공간이 확보되었다. 그러자 친구의 손놀림이 바빠졌다. 펑크 난 타이어를 떼 내고 비상용 타이어로 갈아 끼우는 작업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일이 마무리된 것은 바르셀로나 도심의 석양이 거의 떨어질 무렵이었다.


우리와 청소차 운전수 라치오도 뭔가 해낸 듯 활짝 웃는다. 그는 한참 동안 스페인어로 뭐라고 불라불라 설명했으나 그걸 알아들을 실력이 우리에겐 없었던지라. 그냥 나름대로 의역을 하는 수밖에 없었지만 다행히 그라시아스(Muchas gracias)라는 단어는 알아들어서 고마움을 진득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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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넘버를 달고 이탈리아도 무사히 넘겨온 우리는 스페인 진입 후 벌써 두 번의 몸서리쳐지는 시련을 겪고 말았다. 그렇게 난리법석을 떨고 라치오가 떠난 뒤 우리는 서로 아무 말도 안 했지만 바르셀로나를 빨리 떠나자는데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다. 시동이 걸리자 우린 환호를 했고 캠핑카는 시 외곽의 그 징그런 아파트촌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쌩 까면서 어둠을 헤치고 아나콘다처럼 슬그머니 바르셀로나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바르셀로나에서 한 일이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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