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란다 델 까스따냐르 (Miranda del Castañar)
도시와는 또 다른 풍경의 즐거움
징그러웠던 바르셀로나 양아치들과 추잡스러운 다로까 경찰들을 힘들게 경험한 이후 며칠이 지나서야 우리는 스페인 중부 아라곤 지역을 통과할 수 있었다. 바로 전편에서 이베리아 반도의 무어족을 내쫓게 된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발렌시아 성 전투 이야기를 했는데, 실제 이베리아 반도에서 무슬림을 격퇴한 장본인은 바로 이사벨 여왕이다.
15세기 왕위쟁탈전이 극심했던 혼란스러운 스페인의 정치상황에서 이베리아 반도 중부에 위치한 붉은 땅의 나라 아라곤의 왕자와 정략적으로 혼인하며, 자신의 불안한 정치적 위치를 현명하게 극복한 이사벨 여왕은 무력을 쓰지 않고 스페인을 무슬림으로부터 독립시켰다. 당시 그녀에게 든든한 세력의 한 축을 담당했던 지지세력이 바로 이곳 아라곤 왕국이다. 만약 아라곤의 정치적 결단이 없었다면 유럽이 무슬림에 흡수되었을지도 모르며,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역사에 가정은 없다. 이사벨 여왕이 스페인 독립 이후 기사들의 전횡과 쿠데타를 예방하기 위해 대항해 시대의 전함들에 전쟁 무사들을 실어 보낸 이후, 우리는 남미에서 호날두라는 흔치 않은 성을 발견하게 되었으며, 마야, 잉카 그리고 미국 인디언의 떼죽음을 경험해야 했으니 참으로 역사는 아이러니하다고 밖에 할 수 없을 것 같다.
애니웨이, 각설하고 힘차게 액셀레이터를 밟아 스페인 중부를 넘어오는 동안 만나게 된 한적한 시골길은 죄다 사기꾼 같던 도시 풍경과는 달리 한가하고 목가적인 풍경들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난 그 풍경이 마치 땅에 내려온 천사들이 아름다움에 취해 미처 맞추지 못한 퍼즐들로 널찍한 땅 위에 방치되어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문득문득 나타나는 오름 언덕 위에 마치 안테나를 꼽아둔 듯 제 멋대로 자라난 올리브 나무 사이로 차를 몰고 지나가다 보면 세상에 무릉도원도 이런 무릉도원이 없음을 느끼게 된다. 우리가 느끼지 못한 스페인의 또 다른 풍경들이다.
여행 시작 전부터 캠핑카 여기저기에서 굴러다니던 유일한 책, [연금술사]에 나오는 주인공 산티아고는 스페인 남부지역의 작은 마을 베스코스 출신이다. 파울료 코엘료의 또 다른 저서인 <악마와 미스 프랭>에 등장하는 마을 역시 베스코스인데, 이곳은 작가가 말하길 프랑스 남부의 어느 작은 마을이라고 한 바, 베스코스는 마을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풍천장어'처럼 너르게 쓰이는 대명사쯤으로 이해하면 좋을 듯하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소설 속 이야기는 산티아고라는 이름은 헤밍웨이의 역작 [노인과 바다]에 등장하는 진짜 노인의 이름이기도 하다. 소설에서는 노인으로만 표기되지만, 헤밍웨이 자신이 소설의 첫 장에 이 소설을 산티아고에게 바친다는 말을 써 놓아서 이후 그 노인의 이름이 산티아고인 줄 알았던 것이다.
여하튼, 베스코스의 양치기들이 양을 먹여 살리기 위해 척박한 땅을 이리저리 수도 없이 오가는 것을 우린 여행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건 필시 삶이다. 여행이란 팔자 좋은 백수들이 럭셔리하게 캠핑카를 빌려 타고 전 유럽을 돌아다니며 놀아 재끼는 것. 뭐 이런 것을 바로 여행이라 한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건 오해이며, 잘못된 편견이자 선입견일 뿐이다. 떠나고자 하는 사람은 다 이유가 있고, 그 이유를 달아 나름대로 해석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지만, 여행이란 오로지 어떤 의지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으며 또 그래서 어떤 것이든 다 의미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멈춘 진짜 '중세'를 만나다
우린 스페인 초입에서의 사건 이후로 일부러 고속도로를 타지 않고 내내 국도를 고집했다. 우리(동양인)를 보고 놀라서 집으로 뛰어 들어간 할머니와 부랴부랴 엽총을 들고 나온 할아버지 부부가 살던 스페인 중부의 작은 시골마을 '꺄스뗄랴'를 비롯해 인적조차 드문 자갈길 위에 장식된 아름다운 운해의 언덕인 '뮤니코'까지 스페인의 작은 마을은 기존 도시와는 전혀 딴 판으로 푸근하며 다정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압권이었던 마을은 바로 14세기의 시간에 멈춰 있는 조용한 산골마을 미란다 델 까스따냐르 (Miranda del Castañar)였다.
이 마을은 시에라 데 프랑시아(Sierra de Francia)로 알려진 살라망카 지방의 남쪽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 경사면을 따라 마을까지 오르는데만 장장 6시간 정도가 소요될 만큼 척박한 오지에 처박혀 있다. 지리적으로는 요즘 TV 프로그램으로 '나는 자연인이다'쯤 되겠다.
14세기 중세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이 마을은 해발 650 미터에 이르는 고지대인데도 겨울에 비가 많이 내리기로 유명하다. 우리가 갔을 때도 추적 추적 부슬 비가 마중을 나왔었으니까. 하지만 산과 산으로 첩첩하게 가려져 바람이 적고 기온이 온화하다. 그리고 진짜 놀라운 것은 이 마을에 있는 투우장이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투우장이란 사실이다. 이 자체 하나만으로도 여기를 순례하는 방문객들이 많다고 하니 가벼이 볼 수 있는 마을은 아니었다.
이런저런 이유를 불문하고 내가 여기에서 받은 가장 큰 감명은 시간의 멈춤 현상이었다. 14세기의 삶, 그대로 거기는 고스란히 멈추어 있었다. 마치 <악마와 미스 프랭>에 등장하는 마을 베스코스와 같이 218명의 단출한 주민들은 매일 저녁 조그만 바에 모여서 수다를 떨거나 술을 마신다. 실제로 우리가 마을에 단 하나밖에 없는 펍(Pub)이자 바(Bar)에 들어갔을 때, 놀랍게도 마을 전체 주민들이 모두 모여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심지어 우리가 앉을자리도 없었을 정도로 흥겹게.
미란다 델 카스따냐르(Miranda del Castañar)는 중세풍의 도시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성벽 곳곳에 이 마을의 고귀한 역사가 새겨져 있다. 좁고 가파른 거리와 기울어 질듯 비틀거리는 주택들 사이로 이어진 조그만 돌길은 그 거리를 걸었을 모든 시대 사람들의 발자취를 떠올리게 만든다. 요란한 아이들, 억척스런 주부들, 출정하는 병사들, 고독에 휩싸인 미스테리한 사제들까지 그들의 목소리와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문득 만나게 되는 언덕 600m 높이에 위치 조약돌 더미들은 예술적인 가치를 내재한 이 마을의 면모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해준다.
나는 14세기의 과거로 돌아가 한적하게 거리를 산책하고, 조그만 암석 산을 등반하고, 다시 내려가 모퉁이를 돌아 마을에 들어서고는 시에라 데 프랑시아(Sierra de Francia)의 환상적인 경치에 다시 한번 놀란다. 이 마을은 지구 한 바퀴를 돌아온 낯선 방문자에게 매일매일 일에 시달려야 했던 지난 삶을 잊게 하고, 꿈을 잃어버리고 세속에 물들어 살았던 변변치 못한 삶을 깨어나게 하는 마법의 거리였다. 어릴 적 상상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나는 이곳을 스페인 최고의 마을이었다고 자신한다. 멈춰진 공간이 멈춰진 사람의 의식을 깨우는 놀랄만한 아이러니가 여행 중 처음으로 나를 들뜨고 기쁨으로 넘치게 만들었다. 그래! 여행의 맛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난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여행이란, 15년이 지난 지금도 느껴지는 여운이 아닐까?
그렇게 멈추어진 시간 속에서 파울료 코엘료의 지루한 여인 '미스 프랭'은 비로소 선과 악을 발견했고, 산티아고는 여행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었으며, 낯선 방문자인 나는 그동안 잘못 설정했던 내 인생의 실마리를 다시 한 올 한 올 풀어볼 수 있었다. 멋지게 산다는 것은 바쁘게 산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으라고 했던 선인들의 말을 허투루 들었던 것을 반성하게 되었다는 점과 채근담과 근사록집해에 등장하는 왜 아침마다 마당을 쓸어야 하는지에 대해 너무나 쉽게 이해하고 간과했었는가 하는 세세하고 디테일한 부분까지. 나는 무수하게 많은 내 삶의 오류들을 육중한 골프채로 뒷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강렬한 깨달음을 경험앴었다.
물론 깨닫는다고 곧바로 실행에 옮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로봇이 아닌 인간이니까. 상상할 수 없는 지난 세기의 모습을 간직한 그 거리에서 생각했다. 아마도 연금술사의 주인공인 양치기 산티아고가 탕헤르의 사막에 다다르기 전까지 만났던 사람과 풍경들은 내가 국도로 지나며 보았던 스페인 시골의 사람들과 풍경 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자신의 양에서 욕심을 떼고, 나만의 양이란 아집을 버리고, 무엇이든지 내다 버릴 수 있는 용기를 구하고, 그것이 자연스러워졌을 때 느끼는 여행! 바로 그게 인생의 연금술이 아닐까? 여행에서는 본디 버리거나 얻거나 둘 중에 하나가 마음속 화학작용으로 반드시 일어나게 마련이다. 만약에 시간에 쫓겨 비행기로 허둥지둥 이동하거나 수많은 사람들이 벅적거리는 쇼핑타운에서 여행을 마쳤다면 나는 아마도 여행이 정말 사치스러운 것이고 모든 불길한 일들은 죄다 안 좋은 경험으로만 간직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스페인은 사람으로서 혹은 풍경으로서 혹은 연금술사라는 이야기의 적절한 배경으로서 이번 여행에서 완벽하게 내 마음속 표지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그 표지는 15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난 지금도 내 마음속에 유효하게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