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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모토리 Jan 22. 2019

황무지에서 피어난 위대한 존재감 <로마>

로마 (Roma, 2018)_ 알폰소 쿠아론

로마 (Roma, 2018)_ 알폰소 쿠아론


나는 이 영화를 넷플릭스로 보았다. 하지만 엔딩텔롭이 올라가는 순간 찬탄을 머금는 동시에 슬픈 후회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1970년대 초반의 멕시코를 시대 배경으로 하는 섬세하고 디테일이 가득한 흑백 영상이 마치 로버트 프랭크의 흑백사진집 한 권을 바로 앞에서 감상하는 듯한 격정적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망설이지 않고 바로 그 자리에서 극장 상영관을 뒤져 새롭게 표 하나를 예매했다. 이 영화는 반드시 극장에서 봐야 해.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이 영화를 자신 있게 넷플릭스에서 개봉한 이유를 알았다. 그는 관객이 다시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게 될 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1970년, 멕시코시티의 상류층 가정에서 가사도우미로 일하고 있는 클레오. 그녀는 자신이 속한 상류층 가정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관계와 소통의 삐꺽거림을 접하며, 그녀 자신 역시 새로운 사회적 경험을 접하게 되는데,,.



하지만 그 잔잔한 줄거리에는 감독 특유의 복선이 슬쩍 녹아들어 있다. 그의 전작 '칠드런 오브 맨 (Children Of Men, 2006)'의 마지막 엔딩에 나온 문구가 다시 한번 등장하기 때문이다. 물론 엔딩 텔롭을 끝까지 보지 않으면 확인조차 불가능한 짧은 자막으로 나온다.


'Shantih, shantih, shantih'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 꽃을 피우며.."로 너무나 유명한 영국 시인 T.S 엘리엇의 ‘황무지`의 엔딩에 등장하는 시구다. 생기 없는 뿌리를 깨우는 것은 추억의 봄비다. 그래서 ‘황무지`는 "평화, 평화, 평화(Shantih, shantih, shantih)"로 끝을 맺는다.


쿠아론의 마음의 평화는 얼어붙은 땅을 뚫고 가녀린 새싹이 돋아나는 4월을 추억으로 즐기는 것이 아닐까. 누구에게는 아무것도 아닐듯한 일상적 사건들이지만 주인공 클레오에게는 말을 하지 못할 엄청난 사건으로 모든 것이 다가온다. 마치 조롱 속에 들어가 영원히 늙기만 하고 절대 죽을 수는 없는 신화 속 인물처럼...



하지만 한 생명이 끝이 나고, 그 생명으로 인해 다시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린 그녀에게 있어 삶의 위대한 여정은 4월의 잔인함을 극복하고 맞이하는 한 편의 고요한 평화. 바로 'Shantih'였다.


사진집을 능가하는 흑백의 미장센,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듯한 시대 배경의 디테일, 거기에 절제된 현장음과 음악 없음이 만들어내는 삶의 서사가 안겨 주는 짜릿한 행복.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영화를 보는 이유가 아닐까 하는 깨달음까지 전해 준 올해 최고의 수작으로 평가해 본다.



첫 장면에서 흐르는 바닥 청소 물에 비친 비행기가 중간의 서브미션을 통과하고 마지막으로 하늘로 올라가 강아지 소리와 엮이는 장면은 오랫동안 잊을 수 없는 여운으로 남을 것 같다.


..


첨삭> 그래비티의 고요한 평화가 다시 땅에 발을 딛기를 갈망하는 관계적 욕망이었다면, 이 영화에서 고요한 평화는 엄습하는 관계의 익숙해짐으로 얻어진 새로운 깨달음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싶다.


#꼭_극장에서_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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