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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모토리 Jan 27. 2019

맥락과 개연성의 불일치가 전해주는 통렬함 <불의 축제>

히마츠리Himatsuri (1985) -야나기마치 미츠오



히마츠리 (1985) -야나기마치 미츠오


맥락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 주어진 대상 이외에 그 대상과 함께 제시된 모든 정보. 지각, 기억은 맥락의 영향을 받는다. 예컨대 어떤 사건을 회상하거나 재인할 때, 그 사건이 발생했던 원래 맥락이 많이 제시될수록 기억이 잘된다. 개연성의 사전적 의미도 알아보자. 사건이 현실화될 수 있는 확실성의 정도 또는 가능성의 정도. 영화의 경우 개연성이 높을수록 관객에 대한 설득력도 당연히 높아진다.       


일반적으로 영화는 이러한 맥락과 개연성이 중첩되면서 납득 가능한 이야기 전개를 통해 사건의 절정에 이르게 된다. 맥락이 잘 소화된 시나리오는 주인공에 대한 감정이입이 쉽게 유도되면서 영화적 클라이맥스를 증가시킨다. 또한 개연성이 뚜렷하거나 탁월한 작품의 경우는 전체 플롯의 이해도를 높여 영화가 혹은 감독이 본질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관객이 쉽게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돕는다. 고로, 맥락이 없는 영화는 긴장감이 떨어지고, 개연성이 부족한 영화는 참패를 면치 못한다. 



이 영화. 네이버를 다 뒤져보아도 단 2개의 리뷰만 존재한다. 영화를 끝까지 본 사람이라면 그 이유를 알 것이다. 사실 영화 후기를 별로 쓰고 싶지 않았다. 뭐 이런 거지 같은 영화가 다 있나 싶었다. 심지어 영상을 빠른 속도로 돌려서 보기도 했다. 한마디로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까지 본 것이 아까워서 차마 그만둘 수가 없어 끝까지 보았다. 그런데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장면에 있었다.

       

이 영화 <불의 축제>는 실제로 일어났던 희대의 참극을 토대로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기사가 될 만한 줄거리가 있으니 어지간히 맥락은 있는 영화다. 물 좋고 산 좋은 일본 기후의 작은 어촌 동네에 사는 주인공 다츠조. 벌목꾼인 그는 마을에 해상공원이 들어서고 개발이 된다는 소식이 불편하다. 다츠조가 해상공원에 호의적인 어촌 사람들과 대립하는 모든 설정이 (물론 그가 했다는 증거가 없는 활어 조에 중유가 뿌려지는 사건, 바다에 나가 성관계를 일삼는 행위들) 맥락의 전부다.      



여기에서 감독이 친절하게 보조적 맥락으로 등장시키는 것은 자연과 자연의 대결, 대립이다. 영화에서 다츠조의 직업 현장인 숲은 남성성으로 비유되고 바다는 여성으로 그려지고 있다. 또한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히마츠리(불축제)는 바다를 상징하는 여성의 대비점으로서 불의 남성성을 강조한다. 주인공이 홀랑 벗고 신의 바다에서 첨벙 대고 노니는 설정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렇지만 이런 맥락 쌓기는 딱 거기까지가 끝이다. 



그런 이유로 생기는 문제는 이렇게 흩뿌려진 맥락 속에서 주인공의 마지막 행동의 동기를 찾아낼 개연성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솔직히 말하면 아예 부재중이다. 가족들이 다츠조의 의견을 따라서 땅을 팔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땅을 팔게 되면서 생기는 부조화의 개연성마저도 이 사건의 결말을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그래서 난 이렇게 해석해 보기로 했다. 영화감독에게 영상과 시나리오는 혈액이나 유전자 정보와도 같다. 아름답고 세련된 미장센, 탁월한 영상미와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대사는 그 장면을 낱낱이 해체하여 내 것으로 만들게 하고 싶을 정도로 깊은 중독성을 지닌다. 그러므로 당연히 날것을 어느 정도는 가공해야 가능하다. 


하지만 미츠오 감독의 영상은 관객을 이끌지 않는다. 중층적인 영화의 구성 방식과 느닷없이 터져 나오는 캐릭터들의 행동과 대사들은 영화를 한 번쯤 따라가 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의 손을 마구 뿌리친다. 그러니 이 정도에서 손을 놓고 있다가 갑자기 그리고 느닷없이 말도 안 되는 황망한 결말을 마주 대하게 된 관객은 전쟁에 총을 안 들고 온 고문관 병사의 얼굴을, 수능시험에 펜을 안 들고 간 정신 나간 입시생의 얼굴을, 너무 급히 똥 싸러 들어간 간이 화장실에 휴지가 없는 멘붕 상태의 얼굴이 되어버리고 만다. 아, 이 불친절함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 불편한 감정이 불러일으키는 말도 안 되는 카타르시스는 또 무엇인가?     



그건 감독의 힘이다. 현실과 욕망, 삶의 공간에 실재하는 자신만의 악과 선, 사건과 내면 사이를 비비고 비벼서 강요당하는 듯 끌려가게 만드는 감독만의 독특한 영상언어는 지루하고 편협하게 보이기까지 하지만 결론적으로 이 영화의 결말을 찬란하게 우뚝 세워주고 있다. 


직접 보시면 아시리라. 마지막 장면의 어느 한 곳에서라도 예상된 결말이 곧 실행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을 것이라고. 감독은 말한다. 인간의 저 깊은 내면은 당사자가 아니면 그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이라고. 수많은 비유와 전설, 환경, 자연의 언어들을 무수하게 차용해서 맥락을 만들었지만 마지막에 감독은 그 맥락에 서 개연성을 칼로 자르듯이 삭제해 버렸다. 여기서부터는 인간의 영역이 아닌 신의 영역이라는 듯이. 여기서부터는 이성적 영역이 아닌 욕망과 배신 그리고 광기의 영역이라는 듯이 인간의 영상언어를 통해 거세시켜 버린 것이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우린 무지하게 졸린 눈을 비벼대며 끝까지 영화를 보았지만, 결국 치를 떨며 배신감을 맛보아야 하는 이상스러운 카타르시스를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 댄젤 워싱턴이 나온 영화 <더 이퀼라이저>를 보고 한 줄 평으로 이런 댓글을 남겼다. “이 영화 보고 암이 나았어요”. 얼마나 통쾌했으면 그랬으랴. 나는 <불의 축제>를 보고 이런 한 줄 평을 남기고 싶다. “이 영화 보고 암이 걸릴 뻔했어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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